본인방은 덕천막부때부터 시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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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백년간 계속된 전국시대를 종결시킨「도꾸가와·이에야스」 (덕천막부)는 전쟁이 몸에 밴 무사들에게 바둑을 가르치면 무사들이 조용하고 신중하게 될 것이라고 계산했다.
1612년 그는 명인기소라는것을 차려 본인방 무사로 하여금 기사들을 관리토록했다.
본인방 무사는 명인이되면서 목인방가문을 만들고 후진을 양성했다. 그사이 임·안정·정상등의 가문도 나와 혼인보가문과 경쟁했다. 명인은 이들 가문끼리 실력을 겨루어 최강자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혼인보가문이 가장 실력이 나아 명인이 제일많이 나왔다.
명인에 얽힌 이야기로 흥미있는 것은 쟁기(쟁기) 가 있다. 당대의 명인에 대해 딴 가문의 대표가 도전을 하면 정부에서 쟁기를 인정한다. 양가문은 그동안 연구한 모든 비수 (비수) 를 총동원하여 필사의 대결을 벌인다. 도전자가 지면 귀양을 가야하고 명인이 지면 명인자리를 빼앗긴다.
혼인보가문은 이같은 경쟁에서 딴 가문보다 우세했고 나중에는 독보적인 가문이 되었다.
혼인보가문에서는 제일바둑을 잘두는 사람에게 혼인보란 성(성)을 주어 대를 잇게했다.
1939년 제21대 혼인보였던 수재는 혼인보란 명칭을 일본기원에 넘기고 은퇴했다. 일본기원은 마이니찌(매일)신문과 계약, 혼인보위계승 전일본전문기사선수권전을 개최했다. 여기에서 「세끼야마」(관산리일) 8단이 우승, 제1기 혼인보가 되었다.
그는 관례에 따라 본인방리선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이때부터 혼인보위는 일본 전문기사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권위있는 타이틀이 되었다.
혼인보는 한말의 풍운아 고균 김옥균을 통해 우리나라와도 인연을 맺었다.
김옥균은 19대 혼인보 수책과 친교가 깊었다.
김옥균이 일본에서 유배되었을때 수책은 유배지를 찾아와 보름동안 함깨 지내기도 했다.
본인방수책은 고균을 높은 기상을 가진 대장부로 존경했으며 아마3단정도의 기력을 가진 고균과 수담도 즐겼다.
김옥균은 「다무라」(전촌보수)라는 소년을 수책에게 천거하여 바둑을 가르치게 했는데 이사람이 바로 21대 혼인보인 수재이다.
혼인보가문에는 대대로 전해내려 오는 부목반(부목반) 이라는 이름의 가보 바둑관이 있었다. 아주 가벼웠고 좋은 바둑판이었는데 지금은 일본에서「환상의 명바둑판」으로만 남아있다.
일설에는 본인방 수책이 김옥균에게 맡겨 놓았으나 김옥균이 황급히 일본을 떠날때 없어졌다고한다.
기성으로 불리는중국인오청원은 혼인보 타이틀을 끝내 차지하지 못했다. 오지원이 출전하자 『축이겠다』는 협박장이 날아왔고 일본기사들은 이핑계 저핑계로 대국을 회피해 결국 포기해야만 했다.
그뒤 중국인 임해봉이 혼인보를 차지하여 최초의 외국인 혼인보가 되었다. 조명인이 혼인보가 된것은 외국인으로는 두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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