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은 도끼」에 발등 찍혔다|「파일러트 만년필」망신살의 전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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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지키게 했었다.』
한국 파일러트 만년필 회사(주식회사 신화사)전직 간부들의 회사를 상대로 한 거액 갈취 사건은 이들의 대부분이 근무경력 18년의 창립 멤버였다는 점에서 기업인은 물론 일반에게도 충격적이다.
회사측은 이들이 회사발전에 몸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각종 경리서류는 물론 비밀스런 장부까지 맡겼고, 이들은 바로 이점을 협박의 미끼로 삼아 3억8천5백 만원이란 거액을 손쉽게 뜯어냈다.
임현규(50·전 전무) 송만조(44·전 상무)씨 등 7명이 회사에 대해「집단반란」을 계획한 것은 지난해 4월.
창립 멤버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중책을 맡았지만「회사측의 대우가 섭섭했다」는 것이 반란의 동기였다.
62년에 설립되어 한때 국내 문구류의 선두주자로까지 성장했지만 창립 공신에 대한 봉급 수준은 후발업체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것이 불만의 원인이었다.
이 같은 불만은 자신들의 그동안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회사를 운영해보겠다는 야심과 연결되어 함께 퇴직할 것에 뜻을 모으게 됐다.
그러나 회사 설립에 필요한 재정능력이 문제. 임씨 등은 회사에 대한 자신들의 공적으로 미뤄 5억 원 정도는 회사측에서 밀어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퇴직 후 회사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들이 관리하던 납세서류 등 비밀문서 사본 1백여점을 몰래 빼내 보관했다.
4개월 동안의 준비 끝에 지난해 8월16일 임 전무 등 간부사원 7명이 일괄 사표를 냈다.
퇴직 후 기대했던 회사측의 지원(?)이 무산되자 이들은 곧바로 고홍명 회장(당시 사장)을 상대로「공로금」협상을 벌였다.
협상 과정에서 이들이 훔쳐 내온 비밀서류가 위협의 미끼로 이용된 것은 물론이다.
협상 결과 지난해 8월말 김광수씨(44·전 판매과장)가 1차로 3천5백 만원을 받아낸 것을 비롯, 9월8일 3억 원을 받아 임 전무 등 5명이 6천 만원씩 나눴고 9월말엔 홍용기씨(34·전 영업부차장)가 5천 만원을 뜯어냈다.
협상 과정에서 고홍명 회장은 회사 경영에 환멸을 느끼고 아들 고석진씨(33)에게 사장 직을 물려준 채 방계회사가 있는 태국으로 이주해간 것으로 알려졌다.
임씨 등은 회사에서 뜯어낸 돈으로 영동에 아파트를 구입하는 등 부동산에 투자하거나 몇몇은 철인장 제조 공장을 설립하기 위한 준비작업 중이었다.
기업의 부조리에 관련된 범죄는 쉽게 노출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사건 화되는 경우 기업 측이나 범죄 당사자 모두가 처벌을 받기 때문.
77년3월 거액 탈세와 뇌물수수 등으로 사회문제가 되었던 검인정 교과서 부정사건 때는 회사의 비밀 경리장부를 사진 촬영, 이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해 4천 만원을 뜯어낸 이 회사 트럭 운전사 한모씨(39)등 3명이 구속되었었다.
이들 운전사는 회사측이 세무조사를 받을 때마다『비밀 장부를 트럭에 싣고 계속 돌아다녀라』는 지시를 내리자 어떤 비위가 있을 것으로 눈치채고 사진 촬영해 두었다가 회사 퇴직 후 일을 벌였다.
이들 운전사의 범죄가 2년만에야 드러난 것처럼 이번 거액 갈취사건도 1년만에 사건화 된 것은 회사측이나 범죄 당사자가 모두 굳게 입을 다물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번 두 건의 경우 회사측은 범인들에게 지불한 돈인「공로금」명목으로 적법하게 처리된 것으로 해놓았었다. <한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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