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배급…밥 지어 먹어 피부병 번져 큰 고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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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억류생활>
식사는 우리들 손으로 지어먹었으며 쌀은 47명의 1일분으로 25㎏씩 배급받아 충분했으나 부식은 돌소금과 콩 통조림(18명에 1통), 5일에 한번씩 감자 몇 개뿐이어서 어려웠다.(제53동방호 선원 이황영씨는 나중에 우리와 합류했다)
천막촌 주변에는 조그마한 농장이 있어 토마토·파·고추 등이 폴리사리오들에 의해 재배됐으나 그들 몫이었다. 억류초기에는 화장실출입까지 감시원이 붙어 다녔으나 얼마 후에는 활동에 제약이 없어졌다. 한국선원들은 작업에 동원되지 않았으나 모로코전쟁포로들은 노역을 치렀다.
섭씨 45도의 흑서가 계속돼 팬츠만 입고 지내 옷가지의 부족은 느끼지 않았으나 얼마 뒤부터는 베가 지급돼 우리들이 옷을 지어 입었다.
기후 탓으로 피부병이 많이 걸렸고 파리 떼가 쉴새없이 달려들었다.
캡주비2호 선원들은 땅굴 속에서 매트리스 위에 담요를 덮고 4∼5명이 l조가 돼 지냈다.
선원중의 1명이 이발사여서 간혹 머리를 깎기도 했으나 대부분이 면도칼로 서로 머리를 잘라주었다.
억류생활 초기에는 의부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으나 두달쯤 후 회사로부터의 편지와 라디오1대가 전달됐다. 역류1년 동안 대부분의 선원이 두 차례정도 가족의 편지를 라스팔마스의 회사측으로부터 전달받았다. 내 경우 석방한달 전에 받은 편지가 6개월전인 작년11월에 쓴 것이었다.
억류생활 중 가장 생각났던 것은 김치여서 김치를 다시 한번 먹어보지 못하고 죽는 줄 알았다. 그러나 폴리사리오 사람들의 식사도 빵 한 조각으로 때우는 정도라 없는 살림이나마 한국선원들에게는 특별 대우하는 것 같았다.
수용소 안에서의 선원들 생활은 캡주비 호와 신다바드호의 두 선장이 협조해가며 통솔했고 선원들도 선장들의 말을 잘 따라 거의1년 동안 언쟁 한번 없이 지냈다.
사망한 김유수씨는 호흡곤란과 고열, 목이 붓는 등의 증세로 고생하다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후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그가 사망한 것은 우리가 석방돼서 송환될 때야 알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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