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두뇌 격술로 지능계발" … 요즘 평양선 어린이 바둑 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북한이 최근 어린이들의 바둑을 장려하고 있다. 바둑이 성장기 어린이들의 집중력과 관찰력, 기억력, 상상력, 구조적 결합능력 등 지적 발달에 효과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바둑 대회에 참가한 어린이들이 대국에 몰두하고 있다. [사진 북한 대외선전화보 ‘조선’]

북한에선 요즘 바둑의 인기가 치솟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원(棋院)에 해당하는 바둑장을 찾는 애호가들이 부쩍 늘었는데, 바둑 인구가 3만 명(전체 인구는 2400만명)을 헤아린다고 하는군요. 이 가운데는 어린이들도 적지 않다고 북한 보도매체들은 전합니다. 아이들에게 매우 좋은 지능오락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란 게 평양바둑원 교원 이현옥 씨의 설명입니다.

 최근 평양에서 발간된 선전화보인 ‘조선’ 8월호엔 바둑 붐을 보여주는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바둑’이란 제목으로 2개면에 걸쳐 북한 바둑의 현주소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공원과 유원지,그리고 곳곳에 꾸려진 바둑장들에서는 남녀노소 지어(심지어) 유치원 어린이들도 바둑놀이를 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회에 참가한 유치원과 소학교(초등학교) 저학년 쯤 돼보이는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바둑을 두는 모습이 눈길을 끕니다. 바둑을 두는 옛 선인들의 모습을 담은 고화(古畵)도 등장하는데요. “바둑은 오늘 조선인민이 즐겨하는 민속놀이로, 민족 체육종목으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둑이 북한에서 처음부터 각광받은 건 아닙니다. 1980년대 후반까지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사실상 금기시 됐습니다. 봉건시대 지배층의 유희라는 비판에다 자본주의의 비생산적 놀이라는 오명까지 겹씌워진 때문입니다.

조대원

 변화가 온 건 89년8월 바둑을 민속놀이의 하나로 북한 당국이 규정하면서부터입니다. 이 때 조선바둑협회가 창립됐는데요. 흥미로운 건 바둑이 조선체육협회 산하로 소속됐다는 점입니다. 얼마 뒤 조선태권도위원회가 관장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 현재에 이르게 됐죠. 이렇게 된 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별한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군요. 바둑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 그가 훈련 환경과 자금 사정이 좋은 태권도 쪽에서 책임지고 바둑을 양성해보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북한에서 바둑을 ‘두뇌격술’이나 ‘두뇌무술’로 부르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이는군요.

 90년 5월 평양에서는 ‘전국 바둑경기대회’가 열렸고, 92년 제14회 세계 아마추어 바둑선수권대회에는 문영삼 선수가 북한 기사로는 처음으로 국제 바둑무대에 진출합니다. 95년에 국제바둑협회에 가입하고, 평양 청춘거리에는 바둑회관도 건립됐죠.

 북한이 바둑에 눈을 돌린 건 옛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 이후 국제적인 고립에서 탈피하려는 몸부림이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바둑 강국인 중국의 영향에다가 종주국임을 자처하는 일본과의 관계개선 추진에 적합하다는 판단을 했다는 건데요. 북한 바둑계의 원조스타는 역시 문영삼(37, 아마7단)입니다. 10살 때 처음 바둑돌을 쥔 그는 바둑신동으로 불렸죠. 92년 처음 참가한 국제대회에서 14위를 차지하고, 이듬해엔 같은 대회에서 6위에 입상해 급성장한 실력을 과시했습니다.

 여류기사인 최은아(30, 아마5단)는 91년 입문 6개월 만에 북한 바둑계를 평정해 화제가 됐습니다. 이듬해 세계여자아마추어바둑선수권대회에 7살 나이로 어른들을 제치고 8위에 입상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죠.

 최근 뜨는 선수는 5살 때 바둑돌을 잡아 6개월 만에 1단 실력을 갖춘 조대원(27세, 아마7단)입니다. 그는 지난해 10월 중국 항주국제도시바둑경기대회에서 8승1패의 성적으로 우승했고, 바둑인 최초로 인민체육인에 기록됐다고 합니다.

 이처럼 어린나이에 입문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바둑 조기교육에 대한 관심도 부쩍 늘어났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바둑은 ‘어린이 지능계발의 왕’으로 불리는데요. 예비 기사를 여럿 배출한 명문으로는 평양 보통강구역 신원바둑장이 입소문이 나 있다고 합니다. 이 곳 책임 교사는 최근 북한 방송에 나와 “어린이의 주의력과 집중력을 높이고 학교에 가서도 수재로 뽑히고 학과경연에서 1등을 하는 사례가 많다”고 주장했습니다.

 북한 바둑에서 빼놓은 수 없는 게 하나 있죠. 바로 세계 최강의 컴퓨터 바둑프로그램인 ‘은별’입니다. 97년 조선컴퓨터센터(KCC) 산하의 삼일포정보센터에서 개발한 은별은 세계컴퓨터바둑대회에 데뷔해 전설이 됐습니다. 일본 ‘컴퓨터 바둑 포럼’이 2003년 시작한 이 대회는 은별이 4연승을 하자 2006년 중단됐죠.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대 출신 IT수재인 은별 개발진 5명의 평균 연령이 26.8세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바둑계를 다시 한 번 놀라게했습니다.

 순수 사회문화 교류 성격을 띠는 남북한 바둑 교류가 경색된 남북관계에 훈풍을 불어넣어줄 것이란 기대도 있습니다. 남북 바둑인이 처음 만난 건 10년 전 5월 평양에서였는데요. 당시 남한 아마 바둑 기사 7명이 북한 국제무도경기위원회가 주관한 대회에 참가했죠.

북한 바둑은 선수층이 엷고 프로제도도 운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선수의 경우 우리 정상급 프로에 못지않은 실력을 갖췄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남북한 선수들이 함께 서울 평양을 오가며 친선 대국을 벌이고, 애호가들이 온라인으로 은별 바둑을 즐길 날은 언제쯤 올 수 있을까요.

이영종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