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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내공 임 감독 남다른 ‘촉’ 심 대표 그 조합에 쏠린 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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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호 19면

102번째다. 정작 본인은 남들이 몇 번째라고 헤아리는 걸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다. 그래도 숫자가 갖는 무게와 권위는 어쩔 수 없다.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시작해 50년 넘게 영화를 만들어온 임권택(78·오른쪽 사진) 감독. 그의 102번째 영화 ‘화장’은 국내 최고의 영화제작사로 손꼽히는 명필름(대표 심재명)과의 만남으로 더욱 주목된다. ‘건축학개론’‘마당을 나온 암탉’‘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 소위 역발상적인 기획을 번번이 흥행시켜온 명필름인지라 이번에야 말로 임 감독이 ‘예술영화’나 ‘거장’ 등의 타이틀을 잠시 옆에 놔두고 대중과의 접점을 넓힐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더한다.

영화 ‘화장’으로 베니스 초청 받은 임권택 감독과 제작자 심재명

‘달빛 길어올리기’(2011) 이후 3년 만의 신작인 ‘화장’은 27일 개막하는 제 71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아 9월 3일 월드 프리미어 상영을 앞두고 있다. 비경쟁 부문이긴 해도 현역 감독 중 세계 최고령인 106세의 마뇰 드 올리베이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어둠 속의 댄서’의 라스 폰 트리에,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수상작 ‘지중해’의 가브리엘 살바토레 등 함께 초청된 거장들의 면면에서 이 영화의 예술적 성취에 모인 관심을 짐작할 만하다. 베니스에 이어 토론토·밴쿠버·부산 등 유수의 영화제 상영도 줄줄이 예약돼 있다.

출국을 앞둔 25일 임 감독과 심 대표를 만나 새 영화 얘기를 들었다. 주연배우는 임 감독과 ‘취화선’ ‘축제’ ‘태백산맥’ ‘안개마을’ ‘만다라’ 등을 함께했던 안성기다.

연륜의 힘으로 인간 내면 깊숙이 응시
‘화장’은 소설가 김훈의 동명 단편이 원작이다. 뇌종양 탓에 하루하루 고통에 몸부림치며 시들어가는 아내(김호정)와, 이와 대조적으로 꽃처럼 활짝 피어나는 아름다운 여직원(김규리)을 바라보는 화장품 회사 중역(안성기)의 심리를 따라간다. 제목은 죽은 이를 불살라 장례 치른다는 뜻과 여성이 얼굴을 곱게 치장한다는 뜻 모두를 의미한다. 10년 전 제 2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이 단편을 읽고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심재명 대표가 임권택 감독을 연출자로 떠올린 이유가 궁금했다.

“읽는 순간 인간의 삶과 죽음, 육체에 대한 지독할 정도로 집요한 묘사에 압도됐었어요. 좋은 영화가 되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죠. 계획이 구체화되면서 임권택 감독님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됐어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아무르’(2012) 같은 작품도 있었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50대 중년 남성의 욕망과 절망,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라는 묵직한 주제를 연륜으로 돌파해낼 적임자라고 생각했어요. 중년 남성이 주인공인 ‘어른들의 영화’라는 점에서도 제작자로서 새로운 시도와 모험이라는 의미가 있었고요.”

심 대표의 모험에 임 감독은 반갑게 동참했다. 한지(‘달빛 길어올리기’)나 판소리(‘서편제’‘천년학’), 한국화(‘취화선’), 고전(‘춘향뎐’)등 우리 옛 문화의 아름다움이라는 그의 ‘전공’과는 사뭇 다른 이야깃감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에 반했지만 예산 문제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기억도 있던 터였다.

“오랜 기간 영화를 하다 보니 영화는 감독 자신이 살아온 세월만큼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특히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과 이해의 깊이는 일정한 나이에 이르지 못하면 아무리 애를 써도 잘 안 되는 구석이 있지요. 이제 내 나이가 이쯤 됐으니, 조금은 감당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닐까 용기를 냈어요. ‘화장’은 누구나 마음속엔 있지만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부끄러운 감정을 그립니다. 하루하루 죽어가는 환자, 죽음을 지켜보는 남편, 죽음과 관계 없이 빛나는 젊음, 속에 품었지만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부끄러운 감정들…. 이런 우리의 일상이 거짓 없이 담긴다면 지금까지 제가 만든 영화와는 전혀 다른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알려진 대로 김훈은 문장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글쟁이다.『칼의 노래』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를 쓸 때 ‘꽃이’와 ‘꽃은’ 사이에서 수도 없이 고민을 거듭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화장』도 그런 성정대로 대단히 섬세하게 쓰인 작품이다. 특히 ‘공감각적’이란 표현이 떠오를 만큼 병자의 육체가 무너져가는 과정, 이를 지켜보는 남편의 복합적인 감정의 출렁임 등을 둘러싼 오감을 파고드는 묘사가 영상 못지 않게 압도적이다.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 이들의 생각도 비슷했던 듯하다. 하지만 좋은 원작이 (영화화하기에) 쉬운 원작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성기·김호정·김규리 주연의 영화 ‘화장’

“김훈의 문장과 씨름하느라 한 달을 앓았어요”
“김훈 작가의 원작엔 문장이 주는 엄청난 힘이 있어요. 그걸 온몸으로 받아내는 듯한 감흥을 스크린에서 느끼게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지요. 힘들겠다는 짐작을 못 한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시작을 해보니 정말 힘이 많이 들었어요. 단편인데다 뚜렷한 기승전결을 갖추지 않았다는 점 탓만은 아닌 것 같아요. 3쪽짜리 장편(掌篇)소설로 ‘짝코’(1980)를 찍어보기도 했으니까요. 촬영하면서 한 달을 앓았어요. 꼭 누구한테 한 방 크게 얻어맞아 타격을 입은 것처럼 몸이 견디지를 못했어요. 지금까지 영화를 그렇게 많이 찍으면서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임)

“촬영 시작 전엔 막연한 설렘이 있었어요. 제가 20대 때 영화인의 꿈을 키우게 해줬던 많은 작품들, 그 작품들을 만든 바로 그 감독님과의 작업이었으니까요. 시작하고 보니 설렘이 고통으로 바뀌더군요. 50쪽짜리 단편을 100분 장편영화로 만든다는 게 과욕이었나 싶었을 정도로 감독님이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는 걸 지켜봐야 했지요.” (심)

‘화장’은 올 초 칸 영화제에 출품됐지만 경쟁 부문에 오르진 못했다. 임 감독은 소식을 듣고 심 대표에게 “면목이 없다”는 휴대전화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칸 영화제에 가지 못해 섭섭하다는 실망감이나 상을 꼭 받고 싶다는 욕심 그런 건 없어요. 영화제에 초청됨으로써, 대중에게 알려짐으로써 영화가 얻게 되는 소득이 굉장히 크거든요. 그건 제작자한테 가는 소득이에요. 극장 잡기가 쉬워지고 홍보하기가 좀더 나아지는 거죠. 그걸 못해줬으니 면목이 없을 수밖에요.”(임) 심 대표는 “일정이 빠듯해 후반작업을 한 달도 채 못하고 칸에 출품한지라 아쉬움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고심 끝에 재편집 제안 … 임 감독께서 흔쾌히 수용”
위계질서가 강한 우리 풍토에서 손아래 제작자가 한참 위인, 그것도 세계 영화계의 공인을 받은 감독과 일하는데 심리적 부담은 없었을까. 아니, ‘거장’이란 호칭은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때론 거장 자신에게도 장벽이 되진 않았을까. 임 감독은 “심 대표가 좋은 의미에서 나를 많이 괴롭혔다”며 웃었다.

“촬영을 마치고도 뭔가 분명하지 않은 느낌 때문에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어요. 제가 그토록 고심했던 애초의 의도가 제대로 담기지 못한 것 같아 만족스럽지가 못했어요. 그러던 차에 심 대표가 ‘다시 새롭게 편집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어요. ‘화장’ 이전까지는 단 한 커트도 그 어떤 변형을 가하는 걸 받아들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작품을 완전히 새롭게 볼 수 있는 객관적 시각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편집을 다시 한 걸 보고 제가 연출부들한테 그랬어요. ‘심 대표, 감독 해도 되겠다’고요. 제가 본 제작자들 중 그렇게 냉정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 없어요. 이래서 명필름이 그렇게 많은 영화를 성공시켰구나, 실감했지요.”(임)

“제 딴에는 밤잠도 설쳐가며 고심 끝에 얘기한 건데 흔쾌히 답을 주셔서 참 감사했어요. 자신의 영화에 대해 ‘무한책임’을 느끼는 감독님이기에 그런 결정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렇게 책임감이 크시니 평소 다른 사람들이 감히 이런저런 말을 못했겠구나 싶기도 했고요.”(심)

“‘국민감독’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아주 죽겠어요. 사람들이 내 영화를 많이 봐야 국민감독이지…. 흥행이 안 되니 투자가 안 따라오는 게 참 자존심 상해요. 이번에 내가 분에 넘치는 욕심을 낸 것도 그런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102편을 찍었다고 대단한 노하우가 있는 것도, 더 나은 작품이 나온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열심히 허우적대면서 최선을 다해 찍을 뿐이지요.”(임)

이들의 얘기를 듣다 보니 영화를 100편 넘게 찍은 감독에게도, 20년 가깝게 숱한 흥행작을 기획한 제작자에게도 ‘쉽게 찍히는 영화’란 애초에 없는 듯하다. 심 대표는 “제작자로서 바라는 게 ‘화장’의 상업적 성공만은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감독님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활동하는 사실상 유일한 현역이잖아요. 해외에선 클린트 이스트우드, 우디 앨런, 장 뤽 고다르, 로만 폴란스키처럼 지금도 영화제에 나오고 극장에서 관객과 만나는 노장들이 많아요. 감독님은 한국 영화계의 상징적 존재인데 그런 분 작품이 대기업 투자를 받기 힘든 게 안타까운 현실이죠. 이 영화로 중견·노장 감독들이 새로운 도전을 통해 동시대 관객들과 끊임없이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으면 합니다.”

글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명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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