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혼 책임 소재보다 파탄 현실 중시하는 판결 속속 나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90호 10면

고위 공무원 A씨는 10여 년 전에 수년 동안 이혼소송을 벌였다. 부인과의 불화에 따른 별거 생활이 힘들었지만 공직자라는 신분 때문에 수십 번 망설이다가 시작한 일이었다. 그의 부인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혼만큼은 할 수 없다며 협의이혼에 동의하지 않았다. 소송 결과는 1심과 항소심 모두 패소였다. 부인에게 파탄의 책임이 있다고 보기 어려워 청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판결이었다.

이혼 조건에 다소 유연해진 법원

 그는 이혼을 포기하고 별거 상태로 지내다가 5년 전 다시 소장을 냈다. 법원 분위기가 상대방에게 반드시 책임이 있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사실상 돌이킬 수 없는 파탄 상태에 이른 경우에는 이혼 판결을 내려 주는 방향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계기였다. 부인은 여전히 완강히 이혼에 반대했다. 하지만 “이제는 서로 새 삶을 사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는 판사의 설득에 결국 마음을 바꿨다. 재판은 재산 분할과 위자료에 대한 합의를 거쳐 조정으로 끝이 났다. A씨는 지난해 재혼해 새 부인을 얻었다.

 A씨가 듣고 경험했던 것처럼 법원의 기류가 변했다. 파탄의 책임을 묻기 어려운 배우자를 상대로 낸 이혼 청구소송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책주의’ 원칙에서 다소 벗어난 것으로 보이는 판결들도 종종 나온다.

 대법원은 2010년 원만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하다가 가출해 11년간 별거를 해 온 B씨(당시 43세)가 남편 C씨(당시 47세)를 상대로 낸 이혼 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혼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파탄에 이르게 된 책임의 경중을 엄밀히 따지는 것의 법적·사회적 의의는 현저히 감소했다”고 의견을 밝혔다. 재판부가 B씨가 별거 중 다른 남성을 만나 장애가 있는 딸을 낳았고, 그 딸의 양육을 위해서는 동거 남성과의 결혼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한 판결이었다.

 이후에도 대법원은 46년간 ‘두 집 살림’을 해 온 남편이 청구한 이혼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부인에게 파탄의 책임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사례였다. 남편의 성기능 장애를 이유로 이혼을 청구한 부인에게 ‘성관계 회피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신체적 문제’라는 이유로 패소 판결을 내린 하급심을 뒤집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대법원이 민법이 정한 유책주의를 버리고 파탄주의(책임 문제보다 파탄 상태의 사실성을 중시하는 제도)를 택한 것은 아니다. 민유숙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논문에서 “대법원이 사안별로 이혼 청구에 유연하게 대처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책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허용하는 경우에도 상대 배우자도 혼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판단을 근거로 삼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여전히 유책주의 원칙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인천지법에서 가사사건을 맡고 있는 임태혁 부장판사는 “법적으로 유책주의가 유지되고 있는 한 판사가 파탄주의에 따른 판결을 자의적으로 할 수는 없다. 다만 사실상 관계가 회복될 가능성이 없는 부부는 조정 과정에서 원만한 합의에 이를 수 있도록 중재하려고 노력한다. 요즘 30~40대 판사는 선배 판사들에 비해 책임의 문제만큼이나 파탄의 상황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했다.

이상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