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체장애 학생과 부모가 사회에 보내는 글|자살한 남구현군의 어머니 유재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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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죄 많은 어미 되어 자식의 영혼 앞에 통곡합니다.
각박한 세정에 부대끼면서도 옹골지게 살려던 어린 봉오리가 스스로 지기까지엔 얼마나 많은 설움의 응어리가 여린 가슴을 짓눌렀겠습니까.
먹고 싶어할 때 고기 한칼 제때 못해주고 그렇게 가고 싶어하던 창경원 밤벚꽃놀이 한번 구경시켜 주지 못한 게 못내 칼날 되어 가슴을 저밉니다.
영롱한 눈빛, 해맑은 웃음에 성한 다리 성한 팔로 내달리는 다른 어머니들의 자식들이 부러워 순간이나마 등에 업힌 내 자식과 비교해 보았던 이 천박한 어미의 심성이 자식의 죽음 앞에서 더욱 더 죄스러워집니다.
첫 딸을 낳고 시집 온지 3년만에 아들 구현이를 얻었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첫닭 홰치는 소리가 끝나고 『응아』하는 사내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산모 방에서 터져 나오자 부엌에서 밤새 것 한약을 달이던 시어머니와 안방에서 종종걸음을 치던 시아버님이 마루로 내달리다 이마 받기를 했답니다.
아빠도 시부모도 손꼽아 기다리던 그런 아들, 그런 손자였습니다. 우리 구현이는.
온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탈없이 자라 3개월 째 되던 어느 날 밤새껏 고열에 보채던 구현이는 눈동자가 이상해지고 근육경련을 일으켰습니다. 다리와 손가락이 뒤틀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뇌성마비였습니다. 핏덩이 때부터 그 후 17년, 우리 식구는 참담한 폭풍 속을 걸어온 것입니다.
구현의 나이 아홉 살이 될 때까지 대소변을 안아서 보였습니다. 아침에 눈 떠 밤에 잠들 때까지 아이 옆을 잠시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잠든 얼굴 위에 뜨거운 눈물을 떨군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 때마다 뒤틀린 손가락을 두 손에 잡고 깊은 숲 속의 뜸부기 모자가 되어 평생을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10살이 되던 해 고향인 공주를 떠나 서울로 왔습니다. 봉천국민학교엔 11살 때 1학년으로 입학을 했습니다. 3년 동안 업혀서 통학을 했습니다.
4학년이 되면서 상체가 제법 발달하고 젓가락 같던 다리에 살이 좀 붙게되자 구현이는 자기 힘으로 걸어다니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5m을 걷다간 쓰러지고 또 5m을 가서는 벽에 기대어 쉬어야 했습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저도 6년을 학교에 다녀야만했습니다.
학교계단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나면 부리나케 3층 계단을 뛰어 올라가 소변을 가려 주어야만 했습니다. 3학년까지는 다른 정상아동들과 비슷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4학년에 올라가자 수학성적이 형편없이 떨어지고 조금만 늦게까지 공부를 하면 영락없이 감기나 몸살에 걸려 결석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구현이를 중학교에 전학시킨 것이 한이 됩니다. 마음의 상처가 없었으면 죽음을 택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지난 17년간의 고통보다 중학 진학 후 선생님들과의 대화가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병신자식을 둔 어미의 심정을 봐서 그저 자리에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앉혀만 달라고 했습니다.
사지를 못 쓰고 의사표현이 명쾌하지 못해도 정신은 맑다고 했습니다. 그 때마다 『도저히 안되겠어요』 『전체 분위기만 흐려놓습니다』 『어차피 안 되는 거고…결석이나 시키지 마십시오』라는 선생님들의 말씀이 어쩌면 그토록 고깝게 들립니까.
못난 자식을 둔 어미의 자격지심 때문일까요. 글 한자 쓰는데 방바닥에 배를 깔고 온몸을 뒤틀며 방안을 헤매야하는 아이에게 받아쓰기가 늦다는 꾸중은 좀 가혹하지 않았을까요.
두려움과 주저 속에 짧은 생을 살고 간 아들은 어미의 글썽한 눈에 만월이 되어 차옵니다.
비뚤어진 입에 짓던 기진한 웃음, 제2의 구현이가 나오지 말라는 바람으로 들려옵니다.
구현아, 짜증스럽고 안스러웠던 세상, 이제는 잊어버리고 꽃길 사이를 마음껏 달리려무나. 놀림도 조롱도 손가락질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못 불렀던 노래 큰소리로 부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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