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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들은 왜 보리수가 사랑을 이어 준다 믿었을까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홍주연

성문 앞 샘물 곁에/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서/수많은 단꿈을 꾸었네.

보리수 껍질에다/사랑의 말 새겨 넣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언제나 그곳을 찾았네

『겨울 나그네』, 빌헬름 뮐러, 김재혁 옮김, 민음사

박신영

슈베르트는 빌헬름 뮐러의 시집을 읽고 영감을 받아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를 작곡한다. 사랑을 잃고 시대에 절망한 나그네가 겨울 들판을 방황하는 내용이라 전체적으로 쓸쓸한 느낌이지만, 희망찬 느낌의 노래도 한 곡 있다. 다섯 번째 곡으로 가장 유명한 ‘보리수(Der Lindenbaum)’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이 노래를 배우면서 궁금증이 생겼다. 노래 속의 청년은 왜 하필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사랑의 단꿈을 꾸는 것일까? 왜 보리수 껍질에 사랑의 말을 새겨 넣었을까? 보리수가 독일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이기에 그랬을까?

그림동화 『개구리 왕자』에도 보리수가 등장한다. 공주는 보리수 아래 샘물가에서 황금 공을 던지며 놀다가 샘물에 공을 빠뜨린다. 이때 개구리가 나타나 자기와 친구가 되어주면 공을 찾아 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렇다, 나중에 사랑하는 사이가 될 공주와 왕자가 운명적으로 처음 만나는 장소도 바로 보리수 아래였다. 그림 동화집은 독일에 전해지던 옛 이야기를 모아 문학적으로 다듬은 책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 역시 보리수에 대한 독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보리수 아래라는 공간적 배경은 둘이 앞으로 연인 관계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근대 이전 유럽 대륙에는 숲이 울창했다. 지금도 독일의 삼림은 전체 국토면적의 약 4분의 1이나 된다. 독일인들의 뿌리인 게르만인은 자연스레 나무를 숭배했다. 게르만 전설의 영웅 지그프리트는 용의 피를 뒤집어쓰고 죽지 않는 몸이 된다. 그런데 마침 보리수 나뭇잎이 등에 떨어져 그 부분만 피가 묻지 않았다. 결국 지그프리트는 하겐의 창에 그 곳을 찔려 죽는다. 이렇게 보리수는 고대부터 게르만인들에게 신비한 힘을 지닌 나무였다. 번개와 악마를 막아준다고 믿었기에 성스러운 장소는 물론, 마을 광장과 농가의 마당에 보리수를 심었다. 나무껍질로 부적을 만들기도 했고, 나뭇재를 밭에 뿌려 해충을 없애려고도 했다. 보리수 아래에서 충성의 서약을 하고 재판을 열었으며, 결혼식 등 축제도 했다. 크게 자란 보리수 그늘 아래는 사람들이 모여서 쉬기에 좋았다. 이렇게 보리수는 우리나라의 정자나무처럼, 마을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한 나무였다. 특히 젊은이들은 사랑을 이어 주는 능력을 가졌다고 믿었기에 보리수를 더더욱 사랑했다. 보리수 나뭇잎이 하트 모양이기 때문이다.

아, 내가 본 보리수 나뭇잎은 긴 타원형인데 무슨 하트 모양이냐고? 그 이유는 이렇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보리수라고 부르는 나무는 세 종류이다. 보리수나무과, 뽕나무과, 피나무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리수는 보리수나무과로 잎이 긴 타원형이며 둥글고 빨간 열매를 맺는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는 아열대 지방에 사는 뽕나무과 나무로 우리나라에서 자라지 않는다. 슈베르트 가곡에 나오는 독일의 보리수는 피나무과다. 그러므로 정확히 부르려면 가곡 ‘보리수’는 ‘성문 앞 우물 곁에 서 있는 피나무’가 되어야 하지만, 피나무라니, 어감이 영 별로다.

박신영『백마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저자, 역사에세이 작가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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