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1)제72화 비규격의 떠돌이인생(5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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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기대 안 했던 찬사>
무역회사를 경영하는 어떤 교포하나는 「구라시끼(창부)·레이욘」이 생산하는 어망의 한국특약권을 얻어만 주면 선생님의 「코리언·라이브러리」는 제 혼자 맡아드리겠다면서 내게 「오오하라」(대원)사장을 소개해 줄 것을 여러번 청해왔다.
나는 아쉬운 생각에서 그의 청대로 「오오하라」씨를 같이 만났지만『아직은 어느 나라와도 수출계약을 맺은 일이 없다』는 「오오하라」씨의 대답이었다(「오오하라」씨는 기업인이기보다 문화인으로 더 고명했던 인물이다). 그런 제안을 가지고 간 내가 「오오하라」씨의 눈에는 교포상사의 「브로커」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대판시 남구보사정에서 가방제조업을 하는 교포「가와모또(하본장사)씨는 어느 날 내 사무실로 찾아와 특별회원이 되겠노라 면서 대학에 다니는 딸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 우리집 재산의 반을 써서라도 김 선생님의 일을 도와주세요.」그러면서 김 선생께서 하시는 일이 얼마나 뜻 있는 일인가를 역설하는 겁니다. 오늘도 딸애에게 졸리다 못해 우선 특별회원이 되려고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외롭고 고달픈 가시밭길에도 내 뜻을 알아주는 고맙고 갸륵한 동지가 있었다(나는 그 여대생이라는 「가와모또」씨의 따님을 이날까지 단 한번도 대면한 적은 없건마는-). 그러나 그런 몇몇 갸륵한 교포동지들의 성의만으로는 한일협력의 이사회를 구성할만한 힘이 될 수는 없었다.
일본 신문기자의 경솔한 「인터뷰」기사하나로 해서 나는 인생의 가장 알찬 40대에서 50대 후반에 걸친 한 시기를 조국을 지척에 두고도 못들아 오는 귀양살이 신세를 겪어야했고, 내가 성의와 진정을 기울여 교포사회에 이바지하려고 했던 일들은 하나에서 열까지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만 것은 고사하고, 교포사회와의 마음의 거리를 더욱 더 멀게 해 버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기술에 있어서나 자신이 너무나도 무능 무력했던 탓도 있겠지만 내가 하는 일은 왜 모두 그렇게도 서툴고 어설펐는지-, 아동잡지가 그랬고, 「코리언·라이브러리」가 그랬다. 어쩌면 이것은 내 일생을 두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일종의 선천 결낙증일지도 모른다.
다만 한가지 분명 확실한 것은 내 자신의 이름을 낸다거나, 돈을 번다 거나 하는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했다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가는 발자국마다 「무엇을 위해서」란 잿더미만이 얼룩진 채 소복히 남아있을 뿐이다.
어려서 마음에 새겼던 영도섬의 나루터-,배가 닿을 때마다 뱃전에 매달려 제 몸을 스스로 깎아가던 그 절구공이-, 내가 무슨 위인이요, 순교자라고 그 절구공이에 내 자신을 견주리오 마는, 결과적으로는 헌 누더기처럼 내 자신을 찧고 부수고 하면서 일본과 내 조국 사이를 살아왔다.
그러나 미구에 내 인생이 마치려는 막바지에 와서 예기치 않았던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 작업중의하나인 한국시심의 일본어역-.전통적인 구전 동·민요며 현대시의 일역들이 최근3,4년 동안에 눈에 뜨이게 일본에서 재평가를 받고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동경대학 문학부장이던 「이마미찌 도모노부」(금도우신)교수를 위시한 「하가 도우루」 (방하철), 「고보리 게이이찌로오」(소굴계일낭), 「모리 료오」(삼량)들, 같은 동경대며 어다대 교수들의 한국시 정신에 대한 과대평가하며, 과거 70, 80년간에 일본어로 역출된 외국시집 6백여권 중에서 16권을 추린 학습원대 「후꾸나가」(복영)교수의 『이방의 향기』(79년 신조사간)중에 내 역저인 『조선시집』이 들어있는 등, 그밖에도 내 자신이 기대도 하지 않았던 찬사와 공감의 반응이 일본에서 계속 일고있다는 사실이다.
절구공이는 부서지고 깎이고 해서 마침내는 없어지는 것, 비록 30∼40년 묵은 젊은 시절의 작업이기는 하나 절구공이로 자처하던 내게 이런 현세적인 상찬이 돌아온다는 것은 약간 나를 당황하게 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독자는 내 이런 말을 무슨 겸사나 쑥스러움으로 흘려들을지 모르나 내 역업의 보수가 이런 형식으로 내게 온다는 것은 그 고마움과는 별개로 일본에 대한 내 거짓 없는 심정을 토로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곤란한 심리적인 복선을 가져오게 한다.
되돌아보면 어지간히도 험준한 인생행로였다. 구한국의 「융희」에 태어나 일인들의 권도와 오만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그들의 그 오만이 내 어린 가슴에 민족혼의 씨앗을 심어 주었다.
배삯 1원으로 건너간 현해탄-, 그날부터 시작된 일본과의 연분이 마침내 내 일생을 일본에 붙들어 매고 말았다. 되풀이가 되지만, 좋으나 궂으나 일본은 내쉼 없는 관심의 대상이었다. 무한궤도처럼 앞으로도 수백년·수천년을 이어나갈 한국과 일본의 이 두 병행선-,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어느 한쪽이 불행해서도 안된다. 어느 한쪽의 독선도 비굴도 거기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우공이산의 고사는 아니지만 태산준령을 앞에 두고 호미 한 자루를 손에든 채 나는 그런 어림없는 청사진을 마음속에 그려왔다. 역시 「돈·키호테」일 수밖에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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