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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은 어떻게 기억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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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런던특파원

“부럽다.” 요즘 가장 많이 듣는 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그나마 가까운 거리에서 취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교황수행기자단의 일원으로입니다. 그간 4박5일 일정을 지켜보자니 교황은 진정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갈 줄 아는 지도자입니다. 지도자의 부재 시대에 실로 부러운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시에 그가 집전하는 이런저런 전례를 보면서 2000년 가까운 교황사를 떠올립니다. 지금의 교황 이전에 베드로의 ‘어부(漁夫)의 반지’를 끼었을 300여 명 말입니다. 오늘의 잣대로 보면 훌륭한 교황은 귀하디 귀했습니다.

 그래서 최근 만난 역사저술가 존 노리치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그에게 “교황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기가 언제냐”고 물었더니 그는 주저함이 없이 “르네상스 시기의 교황들”이라고 했습니다.

 르네상스라면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같은 예술가부터 기억할 겁니다. 교황들이 때론 후원자였다는 것도요. 교황이란 본업이란 측면에선 민망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었는데, 그 매력을 침대에서 확인하곤 했습니다. 여러 자녀가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리더십의 화신으로 묘사한, 형을 죽였을지도 모를 체사레 보르자입니다. 율리우스 2세는 또 어떻습니까. 이교도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향했던 그는 그 지향대로 출정(出征)하곤 했습니다. 싸우느라 바빠서 신학을 할 틈이 없는 전사(戰士)였습니다. 당대 최고였던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16세3개월 만에 추기경에, 38세에 교황이 된 레오 10세는 과연 부잣집 도련님 출신답게 즐기며 살았습니다.

 노리치가 그럼에도 이 시기에 애착을 보인 건 로마 재건 사업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는 몇 차례의 약탈과 교황들의 60여 년 넘는 방치로 말라리아 모기의 서식지로나 좋은 곳이었습니다. 많은 이가 말라리아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알렉산데르 6세도 레오 10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를 거치면서 비로소 오늘날 로마의 기틀이 만들어졌습니다.

 영성(靈性)이 있는지조차 의심받던 교황이 인프라 면에서 탁월했다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당시 교황은 로마를 지키는 세속군주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과연 좋은 교황일까요, 나쁜 교황일까요.

 우린 누군가를 두고 좋은 사람 아니면 나쁜 사람으로 양분합니다. 한두 가지 일을 두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교황사는 누군가를 재단한다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란 걸 알려줍니다. 지도자의 경우엔 ‘더더군다나’입니다. 역사는 겸손을 요구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떠났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란 메시지를 던지면서입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이번에 한 세기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한 훌륭한 교황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고 기뻐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역사는 어떻게 기억할까요.

고정애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