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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없는 길, 문제는 임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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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윤 기자 중앙일보 편집국장
김종윤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

마크 카니 영국 중앙은행(영국은행) 총재는 지난 13일(현지시간) 경제전망을 발표한 뒤 이렇게 선언했다. “앞으로 영국은행은 노동자 임금에 초점을 맞추겠다.” 영국 경제전망은 나쁘지 않았다. ‘실업률이 2008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다만 가계 임금은 2009년 이후 처음으로 줄었다.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3.4%에서 3.5%로 높인다’. 경기 호조와 고용시장 개선의 메시지가 담겼다. 그런데도 카니 총재는 “다른 지표가 좋아도 임금이 오르지 않으면 기준금리 인상은 없다”고 밝혔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도 같은 고민에 빠졌다. 7월 미국의 시간당 평균 임금은 2%(전년 대비) 증가에 그쳤다. 임금 오름세가 미약하니 7월 소매판매는 전달과 비교해 제자리걸음이었다. Fed는 이미 돈줄을 죄기 시작한 상태다(양적완화 축소). 다음 순서는 기준금리 인상이다. 하지만 임금이 오르지 않으니 소비가 꿈쩍도 않는다. 당분간 금리 인상이 요원한 이유다.

 노동자의 임금 수준은 통화정책은 물론 경제 전체를 운영하는 데 핵심 변수다. ‘임금 상승→소비 증가→기업 실적 개선→경기 회복’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들기 때문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노동자의 임금을 끌어올리겠다고 깃발을 들었다. 기업이 임금을 올리면 일부를 세금에서 빼 주는 근로소득증대세제가 나온 배경이다.

 벌 만큼 버는 기업이 종업원의 임금을 올리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생산성이 올라가고 이익이 나면 당연히 직원들과 나눠야 한다. 이럴 때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국내 기업의 현실을 돌아보자. 경기 침체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업 간 양극화도 확대됐다. 일부 대기업을 중심으로 임금을 올릴 여유가 있지만 중견·중소기업들은 쉽지 않다.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은 이미 높다. 이런 고소득 종업원들은 임금을 더 받는다고 소비를 늘리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한 번 올라간 임금은 다시 내리기 힘들다는 점이다. 임금을 올렸다가 경기가 나빠지거나 생산성이 떨어지면 다시 임금을 제자리로 돌릴 수 있을까. 노사 간 전면전이 벌어질 게 뻔하다. 세금 깎아 준다는 당근을 내놨지만 이번 세제 개편은 사실상 기업에 임금 올리라고 윽박지르는 격이다. 일본 아베 정부도 기업에 임금을 올리라고 권유하지만 기본 철학은 디플레이션(물가 하락 속 장기침체) 탈출용이다. 물가를 올리기 위한 시도이지 단기 경기부양책은 아니라는 얘기다.

 착한 정책이 모두 좋은 건 아니다. 잘못하면 독(毒)이 된다. ‘지도에도 없는 길’을 가겠다며 채찍을 휘둘러 양떼를 무작정 앞으로 몰기만 하면 되겠는가. 그러다 양떼 다 잃어버린다. 임금 인상, 취지는 좋지만 우리 경제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기업 옥죄어서 임금을 올리면 잠깐 원기가 돌겠지만 그때뿐이다. 모르는 길을 나서려면 나침반 준비하고, 식량 챙기고, 꼼꼼히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새 길을 찾아낼 수 있는 법이다.

김종윤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