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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좋을 씨고…-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가며…생각해 본 것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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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나까지 행복해져>
내가 앉은 바로 맞은편 좌석에 30대 중턱의 젊은 부부가 어린 두 남매와 같이 타고 있다. 건실하게 보이는 남편, 눈망울이 반짝이는 슬기롭게 생긴 아내, 다섯 살쯤인 아들과 서너살짜리 어린 딸-이렇게 넷이다.
두어 달 전에 새로 개통된 지하철 2호선이 잠실 종합운동장을 떠나 신설동으로 향하는 도중이다. 시발역에서 가까운 탓으로 찻간은 붐비지 않아 앞좌석이 바로 보인다. 이렇게 쓰면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지만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들과 나 사이에 한마디 말이 오간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런 얘기를 여기다 쓰는 것일까.
바로 엊그제 일인데도 그 때의 내 감정을 글자로 옮기기에는 약간 힘이 든다. 한마디로 말해서 무척이나 행복스럽게 보이는 한 가족이었다. 바라다보는 내게까지도 그들의 행복의 여운이 울려오듯 했다(과장도 거짓도 아니건만 이런 감정을 어떻게 표현했으면 좋을지….그 날 만난 어떤 젊은 기자에게 그 얘기를 하면서 「나이 탓으로 주착없이 내 과잉 부성애가 고개를 치켜 들었나보다」고 웃었다).
어린 딸이 신이 난다는 듯이 무언가 알아듣지 못할 노래를 부른다. 젊은 엄마가 귓속말로 딸에게 무어라고 한다. 『찻간에서는 노래 안 부르는 거야….』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꼬마는 겸연쩍은 듯이 엄마를 쳐다보고는 씽글 웃는다. 넌지시 미소를 지으면서 그들을 바라다보는 남편, 아들놈은 무표정한 얼굴로 달리는 차창밖에 눈길을 주고 있다.

<비싼 대가 치른 삶>
행복한 사람들,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까지도 행복에 젖어든다는 새 발견-.그러나 눈을 감고 환상에 잠긴 내 가슴에 그때 느닷없이 또 하나 불길한 그림자가 날개를 편다. 인적기 없는 폐허의 서울 거리-. 그 서울 거리의 무너진 벽돌무더기 옆에 혼자 울고있는 헐벗은 어린아이의 사진.
언젠가 본 6·25동란 때 사진의 그 처절한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가슴을 스쳐갔다.
『만일에 6·25의 비극이 또 다시 이 땅에 되풀이된다면 저 사람들의 행복은 어떻게 될 것인가…. 과연 우리들의 오늘의 생활 속에 이것이야말로 1백%의 행복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행복이 있는 것일까.』 휴전선에서 겨우 몇 십리의 수도 서울, 거기 「빌딩」이 서고, 고속도로가 생기고…, 인구밀도로는 세계에서도 몇 째라는 도시 속에 8백만의 인구가 비비대면서 살고있다.
비단 서울뿐이랴. 한반도의 영토 안에는 여기만은 절대로 안전하다는 촌척의 땅도 없다.
국제간의 미묘한 함수관계가 어느 정도의 균형을 유지시키고 있다지만 그 균형이 언제 어디서 깨어지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미친 이리떼들을 지척에 두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현실이요 생활이다.
행복하게 보이는 젊은 부부를 눈앞에 바라다보면서 이런 불길한 환상에 잠시나마 사로잡힌 나 자신을 스스로 꾸짖어도 본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기우나 망상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수긍하리라 믿는다.
새해 벽두부터 이런 글을 써서 사람들의 가슴에 불안을 안겨주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놓여있는 오늘의 위치를 올바르게, 정확하게 측정해야겠고, 그럼으로써 우리들의 오늘의 삶이 얼마나 값비싼 귀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자는 것이다.
어느 나라 어느 누구의 생활이 귀하지 않으리요 마는 오늘날의 우리와 같은 절박한 상태에서 영위되는 삶은 그만큼이나 값비싼 대가가 치러져야 하겠다는 얘기다. 『이 목숨이 어떤 목숨이라고…, 이 행복이 어떤 행복이라고…』. 그 대가는 어느 누구가 치르는 것이 아니요, 바로 우리들 자신이 우리에게 치를 수 밖에 없다. 굳건한 생활정신, 알차고 건실한 기백으로 우리사회가 한덩어리로 뭉칠 때 어느 원수도 감히 우리를 넘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부조리 낳는 사욕>
6·25를 직접 겪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이 공소한 구령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눈으로 6·25의 참화를 목도했고, 두어 해 전에는 휴전선에 뚫려진 땅굴을 이 눈으로 똑똑히 보기도 했다. 백서 대낮에 도끼로 사람을 쳐죽이는 포악 무도한 무리들이 같은 조상의 피를 이어받은-같은 역사, 같은 문화아래 자란 내 동족이라니 모골이 송연하다는 형용으로는 오히려 부족하다.
탐스럽고·행복하게 보이던 그 젊은 부부를 찻간에서 본 같은 날 저녁, 나는 같은 2호선으로 집에 돌아왔다. 바꿔 타는 신설동 「폼」에 차가 들어오자 사람들은 한꺼번에 몰려들어 서로 먼저 타려고 아우성을 쳤다. 어느 「버스」정류장. 어느 열차정거장에서나 매양 보는 풍경 그대로였다.
종점까지는 겨우 12, 13분의 거리, 그나마 10분이 멀다하고 들어오는 차다.
자리가 없다고 서서 가지 못할 만큼 먼 거리도 아니련마는- 나 하나만이 편하고, 나 하나만이 잘 살자는 이 한심스러운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오늘의 어려움을 이겨 나갈 것인가, 아득하기만 하다.
이기심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있다. 어느 의미로는 이기심이야말로 인간 사회의 필요악일지도 모른다. 「나」라는 개인이 잘 살게 되는 것은 나아가서는 그 국가, 그 민족이 부강하게 된다는 이론도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네의 이기심은 그런 위대한 논리와는 좀 거리가 먼 것 같다. 나 하나만이 잘 먹고 잘 사는 것, 남이야 어떻게 되든 오직 나 하나만이 안중에 있다는 것-. 여기서 뿌리깊은 불신병이 조장되고. 씻어도 씻어도 끝이 없는 부조리의 씨앗이 배태된다. 고객은 상인을 믿지 않고, 기업주는 고용인을 믿지 않고, 사회는 정치인을 믿지 않고-, 「믿지 않는다」는 것이 마치 생활의 철칙이요, 지침인양 이 비뚤어진 철학이 굳어버리고 체질화되어 버린 것이 오늘날의 우리사회의 풍조다.

<애정 있는 비판을>
「한마음으로 뭉친다」는 말이 한갓 허울 좋은 구호로만 그친다면 이 국토 이 민족의 미래는 이미 끝장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또 하나의 문제점-이것은 비단 우리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세대의 격차에서 오는 단절의 벽,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를 믿지 않고 늙은이는 젊은 세대를 불신하는 이 엇갈린 감정의 대립도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시대의 불행임에 틀림없다. 이것을 유교 혹은 불교적인 구은상과 기독교로 해서 도입된 신사조의 감각 탓으로 해석하려는 이도 있으나, 그렇게 단순하게만 처리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오늘을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새대 간의 불협화음을 두고도 진지한 타개책이 강구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누구를 탓하고 나무라는 글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은지도 오래지만 종기를 고치려면 우선 고름(농)부터 까내지 않을 수 없다. 이왕 말이 난 김에 한마디 고언을 덧붙여야겠다.
비판이란 그 나라 그 사회를 올바르게 잡는 나침반과도 같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애정을 뒷받침으로 한 비판만이 옮은 나침반 구실을 한다. 애정 없는 비판-제 지각을 과시하려드는 비판, 비판을 위한 비판 따위는 사회를 거칠게 하고 메마르게 하는 한갓 독소일 뿐이다.
우리민족을 가리켜 웃기기 힘든 민족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역사의 신산과 험준이 우리들을 맵고 짠 민족으로 만들어 버린 탓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구전민요에는 기소와 해학이 만만찮게 자리를 잡고 있지만 이웃 나라 일본과 비교해보아도 우리네의 「웃음」이 훨씬 더 짙고 짭짤하다.
여간한 풍자나 익살로는 쉽사리 웃지 않고 웃기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의 체질인 것 같다.
50년도 더 지난 옛 얘기지만 춘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우리 사회에 크나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민족을 개조하다니. 제깐 것이 무엇 잘났다고…」그런 의식에서 온 반발이요 비난이었다.

<공정한 일언론도>
춘원은 일제 말기의 변절로 해서 지탄의 대상이 된 분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몇 십년을 앞선 「민족개조론」은 결코 민족을 배신해서 써진 글이 아니었다. 겨레를 향한 어쩔 수 없는 신앙-그것을 바탕으로 써진 그 글이 무작정 타매와 악성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비판에 있어서도 귀중한 반성의 자료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애정의 뒷받침이 없는 비판-, 그것은 사회를 이끌어갈 길잡이가 될 수는 없다. 동시에 옳은 비판에 성의껏 귀를 기울이는 겸허한 자세를 우리는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난 세전에 한달 남짓 일본을 여행하고 돌아 왔다. 여러 사람들이 묻는다. 『일본이 꽤나 시끄러웠을텐데 별일 없었어요?』 『별일이라니요, 아무 일도 없었지요』-. 내 대답은 언제나 한가지였다.
머리에 철모를 쓰고 대우특서한 흰 헝겊을 어깨에 두른 용사(?)들을 거리에서 몇 번 보았고 「스루가다이」 (준하대) 대학가 담벽에 이웃 나라를 헐뜯고 비방하는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려있는 것도 보았지만, 그런 풍경은 어제오늘 처음 보는 것도 아니라 내게는 별 흥미거리가 되지 못했다.
신문이나 잡지가 한국의 국내문제를 두고 왈가왈부한 기사가 더러 눈에 띄었으나 그 중에는 가장 공정하게 한국을 지지하는 여러 식자들의 견해를 종합 취재한 『주간신조』의 기사 같은 것도 있어서 말하자면 피장파장이란 느낌이었다.
일본의 시 잡지 『지구』가 창간 30주년을 자축하는 뜻에서 「국제 시인회의」를 연다고 해서 한국에서도 28명이 참가, 현역 시인도 아닌 내게까지 초청이 왔다.

<일서 우리말 강연>
그 첫날 내가 한 「동양의 시심」이란 강연은 (지난해 12월 4일자 「중앙일보」에도 대요가 실렸지만)이것은 일어 아닌 순전한 우리말로만 한 강연이었다. 50년전 일본서 낸 6백87 「페이지」의 『조선 구전민요집』에 단 한자도 일문을 넣지 않았던 것과 이번 한국어만의 강연- 50년을 사이에 두고 무슨 한 짝을 이룬 것 같은 익살스런 쾌감도 미상불 없지 않았다. 해방 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10년전, 20년전만 해도 이런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치나 일본이 달라진 것도 사실이다.
시우 구상과 같이 초대되어간 「일본 문화회의」-일본문화를 대표하는 각계각층의 지식인들이 회비 2천「엔」씩을 내고 모인 자리에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일본의 눈부신 오늘의 발전에 비해서 우리 한국은 아직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초라한 현실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어느 누군가가 한국과 일본을 지금 맞바꿔 줄테니 어떠냐고 묻는다면 선뜻 그러마고 대답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한국에도 불효 막심한 패륜아가 있겠지요 마는 꾸중을 들었다 해서 재 아비·어미를 쇠망치로 때려죽이는 그런 자식이 있다는 얘기는 아직 못 들었읍니다.
이십칠 팔년 전 이 사람은 「조일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을 피부병으로, 일본을 척추「카리에스」로 비유해서, 일본의 장래에 우려를 표한바 있었읍니다. 그 기자는 일본의 척추「카리에스」는 엎어두고 한국의 피부병만을 커다랗게 들추어서 한국의 위정자들로부터 이 사람이 비국민의 낙인을 찍히기도 했읍니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을 볼 때 20여년 전의 그 날의 우려가 이 사람의 지나친 기우가 아니었던 것을 새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공항서 얻은 기쁨>
지난해 내가 중병을 알았을 때 백여명이 모금까지 해서 위문금을 보내준 것도 바로 이 문화회의의 「멤버」들이었다. 오로지 우호와 성의로 나를 맞아준 이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은 예를 벗어난 노릇 같기도 하지만 일본의 젊은 세대를 두고는 남의 일 같지 않은 암담한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의젓한 중류 가정의 재수생이 제 부모를 타살하고는 강도살인으로 위장하려다 들통이 난 사건이 있은 2, 3일 후에 또 사소한 문제로 제 친 어머니를 쇠몽둥이로 타살한 중학생이 있었다.
내가 일본에 머물던 불과 며칠 동안에 이런 끔찍한 불상사가 연쇄적으로 꼬리를 물었고,오래 전부터 나와 친하던 어느 고교교사는 밤길에서 가르치는 제자를 만나면 슬그머니 길을 피한다고 했다.
중·고교학생이 교사를 두들겨 패는 것이 무슨 유행같이 되어 있어 내가 동경 닿은 날 「조일 신문」 조간에는 사나운 「불독」을 길들여 구단 옆에 앉혀두는 교사를 만화로 그리고 있었다.
경제성장의 부산물인지. 지나친 자유 탓인지 하옇든 문제치고는 딱하고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김포공항에 닿았을 때 무심코 내 입으로 중얼거린 것이 「내 나라 좋을 씨고…」하는 무슨유행가 귀절 같은 한마디였다.
그도 그럴 밖에 없는 것이 여권을 조사하는 출입국 관리의 관리가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네요』하고 다정하게 인사를 해 주었고, 수하물을 검사하는 세관 관리는 내 짐 속에 서도에서 쓰는 지단이 있는 것을 보고 『글만 쓰시는 줄 알았더니 글씨도 쓰시는구먼요』하고 이 역시 상냥하게 나를 대해 주었다.
내 조국이 아니고서야 어디서 이런 관리들을 만나리…. 그러나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나라 좋을씨고…」하고 내가 혼자 중얼거린 것은 여객기의 「트랩」을 내릴 때부터 였으니까-. 【김소운<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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