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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랭군" 아웅산 유족 보듬은 요한 바오로 2세처럼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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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8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장애인들과 만나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에도 한국을 방문했다. [중앙포토]

프란치스코 교황은 14일 서울공항에 내린 뒤 “세월호 희생자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다”며 유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공교롭게도 교황과 한국은 첫 인연부터가 ‘상처의 치유’였다. 과거에도 교황은 상처받은 대한민국을 위로했고, 그런 교황에게서 한국민들은 위로를 받았다.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 건 30년 전이 처음이었다. 당시 교황은 성 요한 바오로 2세였다. 1984년 5월 3일 한국에 도착한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비행기에서 내린 뒤 절두산 순교성지로 직행했다. 언덕 위 성당에서 순교자의 후예와 신자들에게 성수 예절을 베푼 뒤 붉은 융단이 깔린 길을 따라 걸어 내려온 교황 앞에 다섯 명의 여성이 나타났다. 뒤따라 걷던 김수환 추기경이 귀엣말로 교황에게 속삭이자 교황은 “아, 랭군(미얀마의 옛 수도인 양곤을 부르던 말)…”라고 읊조렸다. 여성들은 다름 아닌, 7개월 전 미얀마 양곤에서 발생한 아웅산 테러 때 순직한 이들의 부인이었다.

 북한은 83년 10월 미얀마를 방문 중인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노려 폭탄 테러를 했다. 이로 인해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과 서석준 부총리 등 17명이 목숨을 잃었다. 각 부처의 장·차관과 외교사절 등 국가적 인재들의 참혹한 희생에 한국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교황의 절두산 성지 행사에 초청된 부인들은 서 부총리의 부인 유수경씨, 김재익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의 부인 이순자씨, 강인희 농수산부 차관의 부인 김경자씨, 이재관 대통령 공보비서관의 부인 이령수씨, 이중현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의 부인 강민선씨였다. 김 추기경이 유씨를 영어로 소개하자, 교황은 유씨의 두 손을 잡은 채 말없이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수행원이 십자가가 달린 흰색 묵주를 쟁반에 올려 가져오자 그 묵주를 유씨의 손에 쥐여주며 눈을 감고 강복(降福)을 빌었다. 다른 4명과도 차례로 손을 잡고 묵도를 올린 뒤 묵주를 선물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에 오는 항로 자체로도 한국 국민에게 위로를 건넸다. 83년 9월 1일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대한항공(KAL) 007편 여객기가 운항했던 ‘로메오 20’ 항로를 그대로 되밟아온 것이다. 당시 여객기는 관제사와 조종사의 실수로 정상 항로를 벗어나 소련 영공으로 접근했고, 이를 미 항공기로 간주하고 출격한 소련 전투기가 미사일을 발사해 탑승객 269명이 전원 숨지고 말았다. 전두환 대통령을 만난 교황은 이 사건을 언급하며 “이는 폭력에 의해 저질러진 매우 비극적인 사건으로, 우리 모두에게 깊은 충격을 줬다”며 “나는 (소련 영공을 지나며) 그날의 희생자를 위해 기도했다”고 말했다. 전 대통령은 “교황께서 KAL기 항로를 따라 오셔서 매우 감명 깊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4박 5일의 일정을 마치고 한국을 떠날 때는 실향민과 이산가족들의 아픔도 위로했다.

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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