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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민위생관념 부쩍 높아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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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그림 같은 섬들이 점점이 수놓은 다도해의 한복판인 전남 신안군 안좌면 기좌도 두리. 목포서 통통선 뱃길로 1시간반-.
은백의 바닷새가 수무를 추고 「에머럴드」빛 겨울 바다가 감싸고 있는 섬 마을은 한 폭의 그림일 뿐 초추를 강타했던 「콜레라」진원지란 불쾌감은 좀체로 느낄 수 없다.
10년만의 불청객 「콜레라」로 추석 명절을 잃었다. 생선횟집·냉면집이 한철 장사를 놓쳤고 이상 기온에 「여름」을 빼앗겼던 관광업계는 「가을」마저 앗겼다. 활선어·농산물 수출길이 막혔고 외국관광객은 한국을 외면했다. 「콜레라」비상령은 9, 10월 두 달을 정신 못 차리게 휘저어 놓았다.

<빼앗긴 추석명절>
첫 환자가 발생했던 기좌도 두리마을. 포구에서 굽이굽이 10리 산길을 돌아 섬의 서남쪽 끝. 야트막한 언덕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45가구가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있다.
『12대 선조 때 마을이 생긴 후 신문에 이름이 나기는 처음』이라는 이장 김봉수씨(40)의 말처럼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다. 섬이면서도 농사가 주업인 마을 주민들의 가슴속엔 기좌도가 「콜레라」발생지라는 불명예가 아직도 응어리져 있다.
딴 곳에서 균이 두리 마을에 묻어 들어와 첫 환자가 발생했지 우리 마을이 역병이 돌만큼 더러운 곳이 아니라는게 주민들의 주장이다.

<아직도 약 냄새가>
이 마을의 장귀섭(67) 김행복(65)씨가 「설사병」으로 사망하자 순식간에 게딱지만한 섬은 방역활동으로 벌집을 쑤신 듯 했다.
싱그러운 잿바람과 구수한 흙 내음의 섬 마을이 온통 소독약을 뒤집어썼다. 마을 오솔길이고 우물이고 부엌·마루 할 것 없이 10번 이상 소독을 했다.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예방주사를 가다 맞고 오다 맞고 대여섯번씩 맞은 사람이 태반이지요. 항생제를 콩 주워 먹듯 하고 생전처음 배설물 검사라는 걸 해봤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코에서 소독약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이장 김씨는 고개를 내둘렀다.
객선운항이 중단되자 육지로부터의 생필품 반입은 물론 농수산물의 반출 금지로 주민들은 생활의 위협을 받았다.
『사람이 오가나요, 음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있나요. 집에서 기르던 닭을 잡아 식구끼리 쓸쓸한 추석을 보냈다』고 김선자씨(47·여·읍동리)는 말했다.
이곳 주민의 소득원은 마늘종 생산. 추석을 전후하여 거두어 목포로 내다 팔아 호당 소득이 1백만원에 이른다. 그러나 뱃길이 끊기는 바람에 때를 놓쳐 대부분을 썩혀 버렸다. 읍동리 곽창석씨(62)는 2백접을 몽땅 썩혀 60여만원의 손해를 보았다.
전화위복.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도 많았다. 『섬 주민들의 위생 관념이 적어도 10년은 앞당겨 높아졌습니다』고 안좌면 강정인씨(47)의 말이다.
바다에서 날 생선을 회쳐먹던 식성이 바뀌고 물을 끓여먹는 습관이 생겼다. 국민학교 어린이에서 60노인에 이르기까지 식사 전 손 씻는게 이젠 자연스럽게 됐다.

<날 생선 아예 금기>
두리에서는 「동네 생기고 처음으로」 7개의 동네우물을 퍼내고 소독을 했다. 마을 공동사업으로 우물에 뚜껑을 해 덮은 것도 「콜레라」홍역을 치른 뒤의 일이다. 집안에 환자가 생기면 서낭당에 엎드려 역신의 용서를 빌고 굿을 하던 전근대적 의식구조가 현대 의학을 믿게끔 된 것은 더없이 소중한 소득이다.
아직도 아쉬운 것은 의료시설. 「콜레라소동 후에도 개선된 것은 없다. 의사1명, 간호원 1명의 읍동리 보건지소가 안주면 관내 기좌·안창·팔금동 3개섬 1만여 주민의 보건위생을 지키고 있다.
보건지소가 있는 읍동리까지 가려면 나룻배를 타고 산길을 걸어 3∼4시간씩 걸리는 곳도 많다.
큰 병이 나면 예나 지금이나 목포 병원으로 나가야만 한다.
죽은 장씨와 같은 날 발생했던 박호선씨(57)는 운 좋게 배를 잡아 목포로 나가는 바람에 바로 치료를 받아 나을 수 있었다.

<풍랑만 없었어도>
주민들은 그후 이곳에 한지의사를 보내주거나 순회 병원선이라도 자주 보내줄 것을 도당국에 요청했지만 아직 무소식이란다.
첫발병자이자 사망자인 장귀섭씨의 미망인 김소신씨(60)는 장씨가 죽은 것은 가까운 곳에 병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서울·부산 등지에 살고 있는 5형제가 『모시겠다』고 청했으나 모두 마다하고 홀로 집을 지키고 있다.
콩밭에 바람이 불면 바다같이 보이고 수수밭에 나가면 미역 밭만 같아 육지에선 살 수 없다는 김씨. 『그 양반 그날도 목포 병원에 갔으면 살았을 것이구먼. 비바람이 치고 풍랑이 심해 도리가 없었으라우』-.
김씨 이마에 깊게 팬 주름살은 하루 빨리 농어촌 의료시혜가 이곳 낙도에 깃들어야 펴질 것만 같다. <기좌도=문병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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