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가구'로 가볍고 시원하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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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디자인의 도시다웠다. 불경기와 전쟁, 거기다 사스(SARS)의 공포까지 한꺼번에 밀어닥쳤지만 이탈리아의 '피에라 밀라노'박람회장은 전세계에서 몰려든 20만 인파로 연일 북적였다.

그리고 손님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지난 8~14일 열린 제42회 밀라노 국제 가구박람회는 한마디로 디자인 상상력의 집합소였다.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모든 것, 아니, 머릿속으로도 그리지 못했던 첨단 디자인이 26개의 독립관으로 나뉘어진 20만㎡의 거대한 공간 속에 끊임없이 펼쳐졌다.

올해 처음 등장한 신소재나 신디자인은 많지 않았지만 지난해의 경향을 다양한 변주로 풀어낸 것만으로도 이탈리아 디자인의 저력을 엿볼 수 있었다.

올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아크릴과 유리 소재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 해엔 '카르텔' 등 일부 브랜드에서만 시도했던 '투명한 가구'들이 올해는 전관에 걸쳐 두루 보였다.

유리는 전통적인 소재지만 유리판을 자유자재로 구부릴 수 있는 최첨단 기술과 결합해 전혀 새로운 가구로 재탄생했다.

한국에서는 값싼 소재로만 인식돼온 아크릴 역시 가벼움을 내세운 독특한 디자인으로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아크릴만으로 이뤄진 디자인도 많았지만 소파의 쿠션받침을 아크릴로 처리한 것 등 부분에만 적용한 디자인도 눈길을 끌었다.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한 필립 스탁은 올해 '마리아 안토니에타'라는 아크릴 커피 테이블을 선보였다.

'다양한 소재의 접목은 디자인의 재창조'라는 말처럼 천연 고무.비닐.가죽 등 상상 밖의 소재를 이용한 독특한 가구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한편 가구의 대표적인 소재인 목재는 주종이 체리(벚나무)에서 오크(참나무)로 완전히 넘어갔다. 특히 밝은 화이트 오크 대신 어두운 다크 오크가 주를 이뤘다.

에이스침대 개발팀 김귀호 차장은 "불경기의 영향으로 가구색이 어두워진 점도 있지만 자연주의의 영향으로 거칠고 자연스러운 질감을 가진 오크가 주목을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인테리어 트렌드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밀라노 박람회는 미니멀리즘의 강세가 계속 이어졌다. 장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단순한 선으로 표현한 가구들이 주를 이뤘다.

장식없이 직선미와 곡선미를 강조하다 보니 손잡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서랍뿐 아니라 옷장의 슬라이딩 도어, 거실의 수납장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가구들에 손잡이가 없었다. 문을 어떻게 여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였다.

또 동양풍의 영향으로 가구가 땅에 붙을 정도로 낮아진 것도 올해의 특징이다.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고 생활하기 때문에 서양의 침대와 소파는 우리보다 훨씬 높았다.

하지만 최근들어 이 차이가 점점 줄어들다 못해 우리보다 훨씬 낮아졌다. 특히 소파 앞에 두는 티 테이블은 대부분 무릎 높이를 넘지 않았다.

밀라노=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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