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반서구」-「이슬람회귀」…종점 모르는 이란 판"문화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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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거야 꼭 중세의의 암흑시대에 사는 꼴이지 뭡니까….』
허여멀쑥하게 생긴 그 20대「이란」청년이 오른손 주먹으로 자동차「핸들」을 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기업주의 아들, 미국「콜로라도」대학 경제학과 졸업,「재즈」광에「테니스」광-이런 신상명세서라면「호메이니」의 눈에는 타락한「서양 회귀」의 한 사람으로 보이기에 충분하다.
『음악은 아편이다.
영화는 인간을 타락시킨다. 양장 여인은 매춘부다.』
이런 투로「호메이니」는 지난3월 문화혁명을 선언했으니,「팔레비」왕정 하에서「서구풍의 모든 것」을 쫓던 중산층 이상의「이란」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서둘러 새 시대에 맞춰 감정조정을 하고 그 대세에서 낙오한 소수파가 이 청년처럼「호메이니」와「이슬람」 혁명을 저주하면서 울분의 날을 보낸다.

<음주 때 태형, 술 밀매면 사형>
작가·예술가·지식인을 포함한. 불평분자들의 입장에서 보면「호메이니」가 지난 봄부터 시작한「이란」의 문화혁명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돈·키호테」의 모험같은 것이다.
혁명 후의「이란」에서는 술을 팔고 마시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음주는 태형으로 다스리고 술의 밀매는 사형이다.
가령「테헤란」에 있는 두개의 한국 식당은 외국인 상대로 술을 팔수 있는 면허를 가지고있는데 술 파는 면허가 있는 음식점에는「이란」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남녀가 함께 영화관에도 못 간다. 함께 수영도 못 한다. 해변은 남자 따로 여자 따로 자리가 분리되고「풀」은 남녀가 시차를 두고 이용한다. 「텔리비전·프로」는 종교적인 것이 태반이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이란」경기가 절정에 올랐을 때 철새처럼「테헤란」에 몰려든 한국여성들의 수는 2백50여명이었다니「팔레비」시대의「이란」이「이슬람」정신의 궤도를 얼마나 멀리 이탈하고 있었던가 짐작이 간다.
문화혁명의 모습을 가장 적절히 드러낸 것이 여성들의「차도르」반대「데모」였다. 「차도르」 여성「이슬랍」신도들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얼굴만 내놓고 전신에 뒤집어쓰는「베일」을 말한다.「호메이니」의 지시를 받은 혁명평당회는 지난 6월 정부기관에 근무하는 여성들에게 근대화된「차도르」인「헤자브」를 쓰고 다니라고 명령했다.
중앙일보의 취재반이 지난 여름「테헤란」에 도착했을 때 거기서는 연일 여성들의「차도르」반대「데모」가 열리고 있었다. 양장 여인과「차도르」여인들이 뒤섞여 수상실 앞이나 「테헤란」대학 앞 큰길에서「차도르」반대 구호를 외치면「신의 당」이라고 하는 극우단체의 청년들과 그들이 동원한「차도르」의 여인들이「반대의 반대」를 마주 외친다.

<반 팔레비가 곧 반 서구화>
그렇게 되면 혁명바람에 직장과 함께 영화구경 하는 재미, 술 마시는 재미를 박탈당하고 하릴없이 거리를 방황하던 사람들이 싸움판에 끼어 들어「데모」는 이내 난장판이 되어버린다.
「호메이니」에게「차도르」는 반「팔레비」·반서구·「이슬람」정신복귀의 상징이다. 그리고 문화 혁명은 반「팔레비」투쟁의 연장이다.
「팔레비」의 부왕「레자·샤」는 1925년「쿠데타」로「카자르」왕조를 뒤엎고 집권한 뒤곧 반「이슬람」적인 근대화에 착수했다.
「레자·샤」는「차도르」금지령을 내리고, 남자들은 양복을 입어야 한다는 우스꽝스런 천령을 내리고, 남녀 공학제를 실시하고, 사원의 토지를 몰수하는 토지개혁에 착수했다.
그렇게 시작된 이른바 백색 혁명은 아들「팔레비」대에 와서 거의 완성을 보게되니「팔레비」왕조와「시아」파「이슬람」성직자들의 투쟁은 반세기 이상의 역사를 가진 것이다.
73년「팔레비」는 막대한「오일·달러」를 가지고 야심적인 경제개발계획에 착수했다. 거기 필요한 ▲미의 기술에 묻어서「호메이니」가 말하는 서양의 퇴폐 문화가 홍수처럼「이란」으로 밀려들었다.
성직자들 쪽에서 보자면「이슬람」혁명이나 문화혁명은 반동이 아니라 지난 반세기동안 「이슬람」신도들이「팔레비」왕조에 박탈당했던「이슬람」의 뿌리를 되찾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혁명의 배후에 가려있는 혁명전략을 못보고는 오늘의「이란」을 회상대로 볼수가 없다.
그것은 중공의 문화혁명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지난 봄 이전까지「호메이니」는「이슬람」혁명의 통합의 축으로서의 자리를 지키면서 정치에서는 초연한 입장을 취했다.
정치무대에서는「아야툴라·베헤슈티」가 이끄는 우파회교 공화당(lRP)과「바니-사드르」의 수건실무파가 주도권을 다투고 있었다.
그러다가「모자헤딘·하르크」(인민 전사단)이라는 좌파 정치세력이 국민들의 반 승려감정을 덜고 세력을 신장하여「바니-사드르」와 제휴하여 IRP를 견제하고 나섰다.

<전쟁이 국민 결속을 촉진>
미국인 인질을 둘러싼「바니-사드르」와 IRP의 싸움은 내부 혼란을 가중시켰다.
「호메이니」는 위기를 느꼈다. 그는「모자헤딘·하르크」를「이슬람」의 이름을 통해 국민을 기만하는 무신논자들이라고 생각하는 처지였다.「호메이니」는 6월부터 국민들에게 「이슬람」정신에 눈 뜨라, 사원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의 정치연성을 했다.「호메이니」의 연설은「베헤슈티」의 우파세력을 격려했다.「신의 당」의 청년들은 거리로 뛰쳐나가「모자헤딘·하르크」의 본부를 불태웠다. 좌파 정당들은 지하로 들어가고 IRP가 압도적인 우세를 잡아「이란」「이라크」전쟁이 일어날 때까지「바니-사드르」는 명거 대통령같이 되어버린 것이다.
문화혁명은 이렇게 현실정치, 특히「이슬람」혁명의 정착을 위한 필요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반동적 또는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으로 움츠러들 성질이 아니다. 국민들의 길속을 가켜 온 반「이라크」전쟁이 끝나고 반미 감정의 구심점인 미국인질들이 석방되고 나면 문화혁명의 바람은 더욱 기세를 올릴 가능성이 많다. <끝> 글 김영희 논설위원 사진 양원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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