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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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우리나라의 옛 혼수를 보면 때아닌 횃불싸움이 있었다. 혼일 전야, 신랑·신부 양가는 각자 횃불을 들고 중로에서 만나 일장화전을 벌이는 것이다.
이때의 승부는 미리 예정되어 있었다. 부가는 패자이고 낭가는 승자. 이런 절차가 끝나면 비로소 신랑집은 예폐를 납입했다.
필경 원시성혼법에서 비롯된 의식같다. 육당은 약탈혼(약탈혼)의 추풍이라고 설명한다.
옛날 새색시의 성장 가운데는 도투락 댕기의 산호주(산호주)가 있었다. 머리위에 엄청나게 큰 가발을 얹고, 여기에 금·은·주옥의 비녀와 산호를 주렁주렁 매단 도투락끈을 늘어뜨리는 것이다. 서민들이 이런 예속을 감당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로는 그런 일들이 여의치 않아 혼기를 늦추는 색시가 적지 않았다. 조선왕조 때는 이런 폐습을 영으로 금지시킨 일까지 있었다. 그 무렵 산호주의 임대상이 번창했던 것도 고소를 짓게한다.
옛사람들은 법도를 따져 혼례를 치르려면 「육례를 갖추어야 했다. 여가에 혼의를 표하는「규채」, 규수의 이름을 묻는「문명」, 혈묘에 점을 쳐서 길조를 얻는「납길」, 길일에 여가로 예물을 전하는 「청기」, 혼가 여가를 찾아가 부를 인도해 교배례를 행하는 「친근」.
그러나 어느 의식하나 정성과 애정이 깃들이지 않은 절차가 없었다.
혼가와 채단(채단)을 함에 넣어 여가에 보내는 납탕만해도 비단(휴단)색깔에 맞추어 청사·홍사를 동심결했다. 이것을 금전지로 싸고, 또 싸는 절차도 여간 아니다.게다가 함진 아비도 복수있는 사람을 골라 복색을 갖추어야 했다.
지금은 이런 풍문들이 한낱 번거로운 의식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옛사람들은 성혼을 한인간의 새로운 첫 발로 생각하고 온 정성을 다 쏟은 것이다.
혼속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많이 속화한 모양이다. 「그리스」에선 지금도 딸을 시집 보낼때는 배(선박)를 준다고 한다. 형편에 따라 크기나 척수가 다르다. 이런 능력이 없는 집안에선 아예 연금를 단념하는 형편이다. 「그리스」에 노처녀들이 많은 것은 옷을 일이 아닌 것 같다.,
독일의 혼속도 보통이 아닌가보다. 결혼을 장려했던「히틀러」는 혼례 걱정이 많은 집안을 위해 혼수백화점을 만들어 연부혼수까지 장만해 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먼 나라 얘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네의 혼속도 적지않은 문제인 것 같다. 요즘 어떤 사회단체에선 혼수를「세미나」의 주제로 삼기까지 했다. 우리의 시속은 자꾸만 뒷걸음을 치고 있는 것 같다.
신혼부부가 맨 먼저 배워야 할 것은 허비나 허식이 아니라 성실한 삶, 절제와 검약의 생활,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어른들이 먼저 명심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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