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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신부 되겠다|감화와 봉사에서|교역자의 길 찾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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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초의 한국인 주교로 서구인주도의 외원에서 한국인에 의한 독자적인 사목권 행사의 기틀을 다지는 등 한국「가톨릭」교회사에 일대의 평기를 마련한 여기남 대주교(79)가 오는 17일로 신부서품을 받은 지 50년이 되는 금경축을 맞는다.
『다시 태어나도 신부가 돼 보다 충실한 주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주로 외원에 의존하던 교회발전이 이제는 몇 억 원대의 성당건립도 한국인 신고들의 자력으로 척척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흐뭇하기만 합니다.』
노신부는 금경축을 맞는 감회를 한마디로 순조로운 세대교체 속에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전에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거듭 감사할 뿐이라고 말한다.
서울 대교구가 거교구적으로 마련하는 노 대주교의 금경축 경축식은 그의 뜻에 따라 「미사」중심으로 조용하고 조촐하게 갖게된다.
여 주교는 이미 각고한 이 기준, 가「요셉」신부와 현재 유일한 생존자인 패천고 신부 등에 이은 6번째의 금경축 신부.
평양태생으로 서울 소·대신학교를 나와 1930년 10월26일 신부서품을 받고 명동성당 보좌신부로 12년을 근무한 후 본당신부를 거치지 않은 채 곧바로 주교로 승진하는「가톨릭」성직사에서의 이답을 보이기도 했다.
노주교가 42년 서울교구장직을 맡고 주교로 승진한데는 당시 「프랑스」신부들이 일인을 교구장으로 앉히지 앉으려는 반일감정도 크게 작용했지만「로마」교황청의 신임이 아주 두터웠기 때문이었다.
『성직자의 기본은 무엇보다도 신자 앞에 모범과 결양을 보여 그들과 일치하며 내세 지향적인 종교의 본령에 서서 「그리스도」의 신음을 전파하는데 정진하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의 사회참여를 소리 높이 외치는 일부 젊은 세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성직 관이 좀 고루하겠지만 역시 거룩한 교역자의 길은 감화와 봉사에서 찾아야한다는 신념을 거듭 강조한다.
80고령에도 식사 때마다「위스키」를「스트레이드」로 몇 잔씩 드는 여 주교는 자신의 건강비결이 보신탕을 즐기는데서 오는 것 같다고-.
1년에 5,6마리의 견공이 여 주교의 건강(?)을 위해 순명 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래서 그에게는 견공에 얽힌 일화도 많다.
한번은 시골 산골에 사는 독실한 신자가 말복 날 커다란 묘구를 한 마리 사다놓고 여 주교를 초청해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간 즉 묶어놓았던 견공이 그만 올가미를 풀고 도망쳐 버리고 없었다는 것이다.
그후 그를 잘 아는 교회인사들 사이에는 『동네 골목에 나와있는 개들이 여 주교만 나타나면 모두 도망친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8·15해방 후 자유당정권말까지 한국의 격동기에서「카톨릭」주교라는 입장을 십분 활용해 국제무대에서 활약한 여 주교의 외교적 공헌은 한국 천주교의 초석을 다진 종교적 공로에 못지 않은 중요한 것들이 많다.
미군정기간 중 「하지」중장의 의뢰를 받아 60명의 정부요직적격자 명단을 작성해 준 일을 비롯, 한국「카톨릭」에 주교가 있다는 사실과 미군성당의「미사」집전 등을 통해 미군들로 하여금 한 국민을 도덕적으로 대하게 하는데 이바지한 것 등은 초기의 공로였다.
48년 「파리」「유엔」총회에서 활약한 장면대표를 세계「카톨릭」우의를 통해 적극 기원한 것과 6·25전쟁 발 발시 세계일주 중「파리」에서 좌석들과 맞서 대사가 공석 중인 「파리」대사당을 지키며 대미·대 언론관계에 활약했던 공로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전쟁 후 미국에 건너가 식품·의약품 등의 후흥원조를 얻어온 공로, 미국「프랑스」독일 등에 유학생을 추천해 보낸 것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여 주교의 알선으로 당시 유학한 저명인사로는 현재 이혈양 전 공화당의장, 이기영 박사 (한국정신문화관)등이 있다.
『성당 안에서 정단구현 성토대회를 가지며 어느 특정인이나 정항 등을 단천하는 식의「교회사회참여」는 바람직한 게 못 됩니다. 어디까지나 기도와 감화, 대화로 불의를 바로잡고 강론을 통한 비판정도에 그쳐야합니다.』
여 주교는 교회의 사회참여문제에 대해서는 현「로마」방황의 입장을 전격으로 지지하면서 사뭇 비판적인 입장이다.「카톨릭」교회 밖에 활약 등으로 한때 정치신부」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던 여 주교는 67년 세대교체를 위한 결심에서 서울대교구강직 사임과 함께 일선 사목에서 은퇴한 이후 자신이 30년 전 시작해 놓은 혈녀 나환자촌 나사로 마을에서 여생의 나머지 봉사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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