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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악의 참 모습 재현|전북 필봉마을 풍물굿 잔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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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산기슭을 깎아다진 넓은 춤판에 해가 저물자 말린 나무뿌리와 삭정이를 쌓아 올린 화롯불이 붉게 타오르고 춤꾼들은 한결 신명을 더해 소고·북·징·꽹과리를뮬 두드리며 흥겹게 춤을 춘다.
멍석 위에 앉아 이를 구경하던 서울등지로부터 이곳을 찾은 3백여명의 구경꾼들과 주민들이 덩달아 흥이 나서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 지난 16일 전북임실군강진면필봉마을의 풍물굿잔치 광경. 전통무용 연구회와 공간사후원으로 마련된 자리였다.
필봉의 풍물굿이 서울등지의 전문가들에게 알려진 것은 지난 79년. 한국 전통무용 연구회 정병호교수(중앙대)가 필봉마을의 남자 1백3명중 40명이 약80∼90년전부터 전승되어온 호남농악 좌도굿 7채가락을 보존하고 있음을 밝혀낸 것이다.
생산을 돕는 노동무로, 「일장단」의 역할로, 풍요한 생산을 기리는 의식의 하나로 조상때부터 전승되어온 농악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는데 큰 의미를 갖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농악이란 명칭은 궁중악의 정악과 구분 짓기 위해 『농사꾼들이 하는 음악』이란 뜻으로 일제때 또는 해방 후 국악의 정리과정에서 붙여진 것. 따라서 농악의 현장인 농촌에서는 타음놀이를 한다는 뜻으로 「풍물」 「풍장」「사물」, 무속에 바탕한 「매구」 「굿」, 공동노동체제에서 행한다는 뜻으로 「두레」, 공익사업에 쓸 돈을 모금한다는 의미의「걸굿」으로 불린다.
이날 필봉마을에서 선보인 풍물굿은 상쇠 양순용씨(42)의 「리드」에 따라 소고의 김종술씨(62), 부쇠의 임초대씨(40), 징의 박종래씨(53)등 36명이 마을 입구 삼거리에서 악기를 치고 흥겨운 춤을 추며 행진한 「길굿」으로 시작되었다. 부슬비가 내려 예정보다 조금 늦은 하오 3시30분께.
이어 마을안 고목앞 당산에 돼지머리와 막걸리등 제수를 차려놓고 축문을 읽은 후 잡색소고·장고·북·징·꽹과리순으로 풍물꾼들이 입당하여 춤과 연주로 마을의 무 사태태평을 비는「당산제굿」이 펼쳐졌다. 「당산제굿」은 보통 음력 정월대보름과 8월대보름 풍년을 감사하는 의식으로 베풀어졌다.
마을공동 우물 앞에서 주민들이 이 물을 마시고 수명장수룰 기원하는 「샘굿」, 마을 가가호호를 돌며 잡귀를 몰아내고 집안사람의 안녕을믈 비는 「마당볼비굿」(마당밞이굿)으로 이어 졌다.
저녁7시 가까이 산기슭 춤판에서 펼쳐진 흥겹고 씩씩한 「7채가락굿」,「호호굿」등의 판굿은 행사가 있을 때 여기저기서 잡이들을 모아 한바탕하고 헤어지거나, 흥행목적의 직업인이 화려하게 펼칠뿐 멋이 없는 오늘날 농악과는 달리 소박한 전통무형문재로서의 멋을 담뿍 지닌 것이다.
흰바지 저고리에 남색조끼, 그 위에 붉고 노란어깨띠를 맨 후 종이꽃을 붙인 고깔을 쓴 풍물꾼들은 시종 『젊어청춘, 시절좋고, 먹고뛰고 뛰고 먹고』등 흥겨운 재담을 섞어 흥을 돋웠고 구경꾼들도『잘헌다』 『어허허! 어어!』 등의 추임새로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다.
손님중에는 미속학의 임동권교수를 비롯하여 박용구·조동화·최현·허규·국수호· 이순열·이경희씨등과 학생들이 대부분.
정교수는 필봉마을 농악보존 마을로 지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의 필봉마을 풍물굿은 문예진흥원에 의해 녹화 보존키로 되었는데 이번 가을 제주에서 열릴 제21회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 참가한다. <임실=박금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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