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구는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다 (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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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부터 스피드건이 개발된 이후로 스카우트들 사이에선 지나친 스피드 지상주의 바람이 일게 되었다. 많은 스카우트들이 전통적인 투수의 3요건 (컨트롤, 볼의 움직임, 구속)중 구속 한 요소에만 너무 많은 신경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능력 없는 스카우트들일수록 스피드건에 대한 의존도가 심한데, 그 이유는 컨트롤이나 볼 끝 움직임의 평가에는 고도의 경험과 집중력이 필요한 반면, 구속이란 요소는 스피드건으로 인해 비교적 객관적인 측정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구는 물리학적 수치와는 별 상관관계가 없는 운동이다. 중요한 것은 타자가 공을 어떻게 느끼는 가이다. 볼 끝이 춤을 추는 공이라면 빠른 공보다 훨씬 더 쳐내기 까다로워진다.

결국 스피드건에 찍히는 숫자에 상관없이 타자들을 잡아낼 줄 아는 투수가 진정 훌륭한 투수다. 만약 공 빠르기만으로 투수의 능력이 결정난다면, 투수 순위에는 강속구투수들이 차례로 올라와있어야 할 것이다.

투수의 능력을 평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광판화면의 숫자 몇 개를 보는 것이 아니라 타자들의 반응을 살펴보는 일이다. 타자들이 그 투수를 상대로 제대로 맞춘 공을 얼마나 많이 뽑아내느냐, 혹은 얼마나 많은 주자를 홈에 불러들일 수 있느냐가 진정 투수의 구위 평가에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물론 스피드건에도 나름대로 쓰임은 있다. 꾸준히 145km의 속구를 던지던 노장진의 구속이 갑자기 140km미만으로 떨어졌다면, 그것은 그 투수에게 뭔가 이상이 있음을 나타낸다. 현장의 코칭스탭에게 스피드건이 효용을 발휘하는 순간은 바로 이런 때이다. 코치는 평균스피드대의 변화 폭에 따라 선수의 컨디션이나 이상유무를 점검해볼 수 있다.

19승으로 2002년도 한국 프로야구 다승왕을 차지한 마크 키퍼 (기아)는 시즌 내내 공이 빠르지않아 불안하다는 평을 받았고, 의구심의 눈초리는 오프 시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야구관계자들이 일반적인 야구팬들처럼 스피드건으로만 투수를 평가하려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착각이다.

190cm가 넘는 장신투수 키퍼가 긴 팔과 긴 손가락을 이용해 스리쿼터로 던지는 커트패스트볼은 그 변화가 매우 심해 웬만한 투수들의 슬라이더 각도를 능가한다. 그가 던지는 포심의 최대구속은 135km내외지만 커터가 130km초반에 달하니, 타자들은 계속 빠른 슬라이더가 오는 것으로 느낄 수 밖에 없다.

홈플레이트 앞에서 공 끝이 지저분하게 변해 타자들이 타이밍을 잘 잡지 못하므로, 구속에 상관없이 타자를 잘 솎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렉 매덕스 (애틀랜타), 톰 글래빈 (메츠), 제이미 모이어 (시애틀), 존 버켓 (보스턴)의 구속은 메이저리그 평균구속 이하이지만 그들은 그 곳에서 뛰어난 투수로 평가받는다. 컨트롤, 공의 움직임, 완급조절이 능숙하기 때문이다.

문현부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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