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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밭·연회장 딸린 도지사 관사, 남경필·원희룡 왜 입주 안 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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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① 경기도 수원시 화서동 43-7번지, 팔달산 서쪽 아래 소나무 숲이 우거진 곳에 자리한 경기도지사 관사의 전경. [사진 경기도·제주도]

최근 경기도가 1967년 이후 47년간 관사로 사용해 온 2층짜리 단독주택을 게스트하우스와 결혼식장으로 활용키로 결정했다. 남경필 지사가 지방선거 당시 내걸었던 “당선되면 관사를 도민에게 돌려주겠다”는 공약의 실천이다. 당초 관사를 허물고 새로 짓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관사 자체가 오래된 근대건축물로서의 가치를 지닌 만큼 원형은 유지키로 했다. 대신 1층의 연회장은 도 행사나 도의회 행사 때 활용하고 2층은 지사 집무실 및 게스트하우스로 쓰기로 의견을 모았다.

 잔디밭은 도민들의 사연을 받아 야외 결혼식장으로 개방하기로 했다. 이외에 도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음악회나 시낭독회, 전시회 등의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남 지사는 수원 흥덕지구의 한 아파트로 이사했다.

원희룡 제주지사도 취임 후 관사로 옮기는 대신 다른 주택을 자비로 구입해 이사했다. 기존의 관사는 박물관 등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도에서 논의하고 있다.

이들 외에도 이번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단체장과 교육감 상당수가 잇따라 관사 입주를 포기하고 있다. 도서관이나 공연장 등 다른 용도로 관사를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 관사를 시민의 품으로 돌려주겠다는 의도에서다.

내부에는 응접실②·다목적홀③·침실④ 등이 있다. 경기도는 이곳을 도민에게 개방하기로 하고 잔디밭에선 도민들의 사연을 받아 야외 결혼식을 진행하기로 했다. [사진 경기도·제주도]

지금은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 신세지만 관사들은 길게는 수십 년, 짧게는 수년씩 도백(道伯)의 보금자리였다. 세월만큼 역사와 사연도 깃들어 있다.

 수원은 1963년 경기도 청사를 유치했다. 당시 경기도 소속이던 인천과의 10년여에 걸친 경쟁에서 승리한 결과였다. 경기지사 관사는 4년 뒤인 67년 도청으로부터 1㎞ 북쪽인 팔달산 서쪽 아래 소나무 숲이 우거진 화서동 43-7번지에 완공됐다.

 관사 터는 준공 때부터 악지(惡地)로 소문이 났던 곳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성 밖 병막골’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18세기 후반 화성 축조 이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병막(病幕)’은 행려병자, 전염병 환자들이 하나 둘 모이면서 외부인들이 기피하는 장소가 됐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지방 곳곳에 조선인 전염병 환자를 격리 수용하던 시설을 두었는데, 이곳 또한 유사한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병막은 6·25전쟁 때 파괴됐고, 64년까지 10여 년간 황폐한 채 남아 있었다.

 병마에 고통받던 이들의 한이 서려서일까. 역대 경기지사들 중 불행한 개인사나 퇴임을 겪은 이가 꽤 있다. 67년 준공된 이후 2명의 지사는 이곳에 입주하지 않았다. 71년 처음 입주한 김태경 지사(13대)는 젊은 나이(37세)에 지사로 발탁돼 화제가 됐다. 그러나 1년 뒤 아내가 청와대의 후원품을 빼돌렸다 발각돼 경질됐다. 김 지사 뒤를 이은 14대 지사는 공관 입주 두 달 만에 어린 아들을 사고로 잃었다.

⑤ 제주시 연오로 140에 위치한 제주지사 관사. 1984년 대통령 지방숙소로 지어져 전두환 전 대통령 등은 해마다 연두순시 때 이곳에서 머물렀다. [사진 경기도·제주도]

이런 불행한 사건이 연달아 터진 뒤 부임한 15대 조병규 지사 땐 출입기자들이 “입주 전 고사를 지내자”고 제안했다. 고사 덕이었는지 조 지사는 3년간 무탈하게 공관에 머물렀다. 이후 93년 3월 심재홍 지사(24대)가 공관을 떠나기까지 17년간은 큰 문제가 없어 관사 터에 대한 흉흉한 얘기는 잊혀 가는 듯했다

그러나 25대 윤세달 지사가 국회 허위 보고 문제로 1년 만에 경질되고 26대 임경호 지사는 ‘부천 세도’ 사건으로 9개월 만에 물러난 뒤 27대 김용선 지사마저 임기를 3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중도 하차하자 관사 터에 대한 소문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29대 이인제 지사가 임기를 10개월 앞두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한 데 이어 30대 임창열 지사의 아내가 구속되는 일까지 생기자 소문은 더욱 힘을 얻었다. 하지만 이후 2002년 취임한 제31대 손학규 지사와 32·33대 김문수 지사는 임기를 모두 순조롭게 마치고 공관을 떠났다.

경기도 관계자는 “관사 터가 아픔과 슬픔의 시간을 품은 대지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은 사실이며 혹 그런 기운이 과거 지사들에게 영향을 줬을 수도 있을 것”이라며 “이제 지사 공관이 대중에게 공개되면 많은 사람의 웃음과 발자국이 이곳에 서린 한을 씻어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고 말했다.

 제주시 연오로 140에 위치한 제주지사 관사는 한마디로 대저택이다. 대지 면적이 1만5025㎡(약 4500평), 건평은 1025㎡(300여 평)에 각각 90평과 66평 규모의 별관과 경비실이 딸려 있다. 제주지사 관사가 이처럼 거대한 건 애초 대통령의 지방 숙소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84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 지방 숙소로 신축된 이곳은 경호 유관시설로 지정됐다. 전 전 대통령이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제주도에 갈 때면 이곳에 묵었다. 그러다 96년 경호 유관시설에서 해제됐고, 이후 관사와 박물관 등으로 활용되다 2010년 다시 지사 관사로 지정됐다. 원 지사가 이곳 입주를 포기한 데에는 공관을 도민들에게 돌려준다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또 다른 큰 이유도 있다. 바로 어마어마한 유지비다. 이 넓은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드는 돈만 연 5억원이라고 한다. 과거 한 지사의 부인은 이곳을 리모델링하는 데 예산을 썼다가 도민들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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