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은행의 권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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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세계 은행은 한국 경제 평가 보고서에서 지난해이래 한국 경제가 성장의 둔화, 물가 상승, 수출 부진과 국제 수지 적자폭 확대 등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이런 단기적 난관들이 4차 계획 기간의 주요 목표 달성을 어렵게 만들 것으로 전망했다.
제11차 대한경제협력회의 (IECOK)에 제출될 세은의 평가 보고서는 한국 경제에 관심을 가진 투자국·차관선들의 이해와 연결되므로 우리로서도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다.
이 보고서는 지금의 경제적 어려움이 「지난 몇년간의 지나친 확대 정책」에서 기인되고 있음을 명료하게 지적했다. 분별없는 확대 지향이 중화학을 비롯한 고정 투자의 급증, 전면적인 신용 증대와 특정 부문의 신용 집중에 의한 「인플레」 압력, 수요의 급증에 따른 농업 등 공급 애로의 확대, 수출 경쟁력의 현저한 약화 등을 초래했다고 이 보고서는 분석하고 있다.
세계 은행의 이같은 인식은 국내 정책 담당자 전문가들의 그것과 대차 없음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현실 인식이 어떻게 유사한가에 있지 않고 그런 인식을 바탕한 장 단기 대응의 방향이 어떻게 다른가에 있다.
동 보고서가 권고하고 있는 정책 제안들은 단기적으로 해결해야할 당면 과제뿐 아니라 장기적인 성장 잠재력의 회복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제시하고 있다.
즉 단기적으로는 금융 긴축에 신축성을 가져 생산·고용과 연결 지워야 하고 국제 수지에 주름이 안 미치는 범위 안에서 주택 건설 등 제한적인 경기 회복책이 가능하며 신축적 환율혼용을 통해 수출 경쟁력을 유지해야 된다고 지적했다. 전통적으로 보수적이던 세은의 이같은 처방 권고는 오히려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나 일면 매우 현실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경제 여건이 석유 위기와 국제 불경기 정치적 과도기 등 복합적 요인들이 얽혀 있어 일사불란한 처방의 논리성만을 주장하는 일이 반드시 유익하지 만은 않다.
때문에 정책의 신축성이 필요하다는 세은의 충고는 귀 담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동 보고서의 보다 큰 비중은 잠식된 현재의 성장잠재력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정책권고 부분이다.
세은은 길게 보아 능률 제고·물가 안정·「에너지」 절약을 겨냥한 근본적인 구조 전환과 개선을 촉구하고 이를 위해 산업·금융 제도의 재편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과거 수년간 중화학 공업에 투자가 너무 집중되어 기업의 유휴 시설 증가, 경기 과열, 재무 구조 악화를 초래했다는 세은의 비판은 충분히 경청할 가치가 있다. 특히 중화학의 비교우위가 자본 집약적 부문에 있지 않음을 지적한 것은 이미 여러 차례 국내에서도 거론되었던 점이다. 진정한 비교 우위를 어떤 전략 부문에서 찾아야 할 것인지 신중한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세은이 한결같이 주장해온 금융 제도 개편 문제도 일거에 해결할 수 없는 현실적 장벽이 있으나 더 이상 금융 시장의 비효율을 방치 할 수는 없는 현실이므로 단계적인 정상화 노력이 불가피하며 이는 곧 금융의 자율화·중립화와 연관됨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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