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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盤上)의 향기] ‘일본 바둑 신화’는 우리의 강박이 만든 허상이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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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호 26면

1978년 8월 조훈현 7단(왼쪽)이 일본의 기성(棋聖) 타이틀 보유자인 후지사와 9단과 대국하고 있다. 월간 『바둑』은 이 대국에 대해 “한국의 정상(頂上)이 일본의 정상을 이겼다”며 자부심을 일깨웠다. [사진 일본기원]

“사카타 에이오(坂田榮男·1920~2010) 9단이 슬리퍼를 신고 유유히 오락가락하며 둘러보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바둑판을 가볍게 훑어보고는 바로 돌을 하나 집어 착점하는 오연한 거동과, 이에 반해 그와 대국하는 중국 기사들이 머리를 끌어안고 고심하는 정경을 볼 수 있었는데 그때 나는 말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9> 신화로 채색된 바둑

1976년 중·일 교류전에 대한 녜웨이핑(聶衛平·62) 9단의 회상이다.

한국도 비슷했다. 78년 8월 한국의 7관왕 조훈현(61) 7단은 일본에 건너가서 스승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1889~1972)의 7주기 참석 후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1925~2009) 9단과 기념 대국을 가졌다(사진). 치수는 조훈현이 흑으로 덤 3집을 내는 것. 당시 맞바둑은 덤이 4집반이기에 한국의 1인자로서는 굴욕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선 아무도 이를 부당하다고 생각지 않았으며 다음해 1월엔 승리 축하연까지 열었다.

일본은 딴 세상이었다. 한국에서 일본 9단은 별격의 존재였고 우칭위안(吳淸源·100)이나 사카타는 신(神)과 같은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문화적 현상은 강박으로 이어져 8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69년 11월 제1회 한·일 교류전에서 정창현(1942~83) 5단이 이시다 요시오(石田芳夫·66) 6단과 만나 백을 잡게 되자 “솔직히 말해서 좀 ‘아찔’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일본, 한국 최고에게도 1집 반 접어줘
조치훈(58) 9단은 천재로 유명한 야마베 도시로(山部俊郞·1926~2000) 9단과 처음 대국했을 때 “언제 야마베의 환상 같은 수법이 나올까, 초조해 하면서 오히려 기다렸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신비스런 수법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야마베의 별칭은 변환(變幻). 조 9단은 그 이름에 현혹되었던 것이다. 승부에서 위축과 강박은 무서운 현상이다.

왜 그럴까? 왜 냉정하게 판단 못하고 지레 겁부터 먹는 걸까? 바둑판이 전쟁터로 인식되기 때문일까? 놀이는 그 놀이에 들어간 순간부터 우리를 세상과 격리시킨다. 바둑판은 상징적으로 전쟁판이다. 전쟁터에서는 지면 죽는다. 이게 무섭다.

바둑에선 누구나 처음엔 하수(下手)의 입장에서 배운다. 주변엔 상수가 즐비하다. 재능이 있고 감수성이 높을수록 상수의 절대(絶對)를 느낀다. 앞에 있지만(相對) 도달하지 못하는 상대. 그것이 상수다.

전쟁터와 하수의 입장. 그것이 바둑에서 불안의 원천이다. 생동하는 세상에서 불안은 필연적인 조건이다.

1963년 제2기 명인전 도전 6국 종국 장면. 애기가들이 몰려와 두 대국자를 지켜보고 있다.

조치훈도 일본 바둑 환상 함께 파괴
일본 바둑은 훌륭했다. 그들이 17~20세기에 이뤄낸 업적은 참으로 대단했다. 가히 신화로 떠받들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20세기 말 한국은 신화를 걷어냈다. 62년 도일했던 조치훈 9단이 80년 명인 타이틀을 획득했다. 한국은 비로소 알았다. 바둑은 신비의 세계가 아니고 지식과 노력의 세계구나.

일본 유학 11년만에 돌아온 조훈현은 인식의 지평이 환상으로 물들지 않았다. 89년 조훈현 9단이 제1회 응씨배를 우승하면서 일본을 넘어섰다. 그러자 한국 바둑계는 그 다음날부터 일본에 대한 환상을 접었다. 조훈현은 이미 78년에 자신만만했었다. 사진을 보자. 어깨부터 손끝까지 팽팽한 긴장에 탄력이 넘친다. 앙다문 입은 투지로 가득 찼다.

강박 극복의 핵심은 ‘신화 같은 일본’이 ‘우리가 만든 일본’이라는 것을 아는 데 있었다. 그것이 투사(投射)를 멈추는 것이다. 다행히 두 천재가 길을 밝혀주었다. 천재가 바둑의 세상을 열면, 바둑 공동체는 비로소 그렇게 열린 세상을 함께 맞아들인다. 바둑은 상징적인 세계. 감수성은 개인의 수준에서만 뚜렷한 능력. 천재가 필요한 이유다.

조치훈과 조훈현 두 천재와는 달리 한국의 다른 기사들은 일본의 실체를 몰랐었다. 그렇다면 뭔지 모르면 그리고 실체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 강박이나 불안이 올 소지가 커지는 걸까?

신화처럼 전해 내려온 ‘위기십결’
동서남북 분간하기 힘든 안개 속에 있을 때 우린 안전한가? 안전하다고 느끼는가?

안개를 설명해주는 신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안전하다고 느낀다. 틀리더라도 설명이 없는 것보단 낫다. 다양한 세상 물상(物象)을 범주화 할 수 없어 무질서하다면 우린 못 견딘다.

주역을 보자. 동아시아의 잠재의식적 문화 텍스트로서 많은 사람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주역. 그 철학을 말하자면 주역 계사전(繫辭傳)이 전부다. 계사전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떤 것인가. 잠깐만 봐도 계사전은 세상의 질서를 세우는 철학적 논장(論藏)임을 알 수 있다.

“하늘은 존엄하고 땅은 가까우니 건곤이 정해졌다. 가깝고 존엄한 것이 위 아래로 배열되어 귀천이 생겼다…현인의 덕은 오래 가고 현인의 업적은 크기만 하다(天尊地卑 乾坤定矣 卑高以陳 貴賤位矣 … 可久則賢人之德 可大則賢人之業).”

질서가 있다면 영원이 있을 것이고, 영원이 있다면 무질서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역에 심취하지만 동시에 심리적인 강박도 갖는 이유다. 더욱이 현인까지 등장한다. 왜 질서와 현인이 함께 등장하는 걸까?

문자를 발명한 중국은 역사로 신화를 대신했다. 역사는 출발이 있고 흐름이 있다. 질서가 잡히고 세상은 통제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그것을 대표하는 존재가 현인들이다. 요·순·복희·문왕…. 인물은 물론 말씀이 곧 권위다. 역사와 현인을 인용하는 버릇은 조상숭배 사상과 관련이 깊다. 인류는 과거의 누군가에게 겁을 집어먹고 사는 경향이 있다.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바둑에서도 권위의 말씀이 있다. 고전 『현현기경』(1349년) 속에 고대 문인들의 기결(棋訣)이 있다. 이런 글이다.

“유능한 이만이 인(仁)으로 지키고 의(義)로 행하며 예(禮)로 질서를 정하고 지(智)로 사리를 판단하는 것이니…”

이리 보면 바둑은 인의예지신, 그것이다. 이런 글이 적잖은 데, 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인용하곤 했다. “순 임금이 아들 단주를 가르치기 위해 바둑을 만들었다”는 기원설(起源說)도 대표적인 인용문이다.

‘위기십결(圍棋十訣)’이 있다. 전설적인 인물 왕적신이 지었다는 이야기가 신화처럼 흘러 내려왔다. 내용은 이렇다. “상대의 집에 쳐들어갈 때는 깊이 들어가지 마라(入界宜緩).” “상대가 강하면 나를 정비하라(彼强自保).”

대단해 보이지만 전투 중심의 사고였던 ‘싸움 바둑 패러다임’에서 ‘조심해!’ 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결(訣)이다. 그것도 십결(十訣)이다. ‘10’은 완전한 것. ‘결’은 지혜. 그러기에 반론은커녕 지혜의 보고처럼 받드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가끔은 벌어진다.

동아시아에서 바둑은 신화로 채색이 되어 있다. 바둑은 이미 ‘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다. 현실의 바둑은 관념적인 바둑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물론 문제 있다는 말은 아니다. 환영 없이 감성 없다. 삶의 풍요도 없다.

“멀리 있는 건 대단하게 여겨진다”
바둑만 그러랴. 여행기를 보자. 오지(奧地)를 여행하곤 그 여행지를 신비로 채색하는 일은 흔하다. 사진 몇 장 찍어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그들…” 운운(云云)한다. 내면의 평화는 얻기 힘들다. 어떤 사회도, 어떤 역사도 얻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사진 찍은 사람은 불과 며칠 만에 알아낸다. 전형적인 투사다.

히말라야 아래 부족 세르파(sherpa)들의 그 평화롭고 수줍은 미소에 감동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들 사회의 권력관계 긴장이나 계급적 제약으로 인한 경제적 곤궁은 누가 짐작할 것인가. 사진은 보지만 연구서는 읽지 않는다. 현재 자신의 불만을 어루만지고자 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문명에 대한 거부감을 내세운 샹그릴라(Shangri-la)다. 전형적인 상그릴라 중 하나는 티베트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는 누구나 들어서 안다. 얼굴도 안다. 얼굴을 넘어선다면? 많은 사람들이 티베트를 영적인 나라로 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꿰뚫어 볼 안목이 없다면 멀리 있는 것은 대단하게 여겨진다. 종교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토착 종교를 믿는 경우가 많지 않은 이유다. 멀고 부족하고 모르는 게 귀하게 여겨진다. 경제학적 논리로도 그렇다. 가까이 있는 종교도 모르는데 멀리 있는 종교를 알까. 모르니까 믿음으로 전환할 뿐이다.

어떤 이유로 편견을 갖게 되는가? 고전이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1978). 도날드 로페즈(Donald S. Lopez)의 『샹그릴라의 포로들 (Prisoners of Shangrila)』(1998). 채색된 안경을 쓰게 되는 과정을 넓고 깊게 추적했다.

일본 신비 사라지자 좌표 잃은 한국 바둑
강박은 가져도 좋다. 넘어서는 힘이 된다. 바둑은 문화 텍스트적 성격 때문에 수 천 년간 신비로 여겨졌다. 기대가 컸다. 기대가 큰 만큼 환상을 만들지 않기는 어려웠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적절한 때에 스스로 만든 안개를 거둘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신비가 사라지면 어려움이 온다. 바둑이 그랬다. ‘만들어진 일본’이 갑자기 지평선에서 사라지고 나니 한국 바둑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 힘들었다. 좌표로 기능했던 상대가 없기에 그렇다. 90년대 한국 바둑의 자아 팽창은 그 때문이었다. 스스로 대단하다고 자부했는데 사실은 뭐가 뭔지 잘 몰랐던 것이다. 정체성이 모호해진 것은 당연했다. 예도(藝道)냐 스포츠냐. 어지러웠다.

제한시간도 그랬다. 불과 6년 만에 5시간에서 2시간으로 줄였는데 사고의 깊이를 가볍게 본 것이다. 자아 팽창 이후 20년 동안은 한국 바둑이 자신을 잃은 시기였다. 이제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하고 있다.

투사에서 깨어나면? 현실이 있다. 종언을 고하는 역사도 없고 평화에 싸인 샹그릴라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숙제와 고민을 머금은 일상이 있을 뿐이다. 그게 현실이다. 갑자기 밤중에 적이 쳐들어온 듯도 한데, 그러나 걱정할 게 무어 있으랴. 고민이 일이다. 그것이 세상이다.



문용직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한국기원 전문기사 5단. 1983년 전문기사 입단. 88년 제3기 프로 신왕전에서 우승, 제5기 박카스배에서 준우승했다. 94년 서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바둑의 발견』 『주역의 발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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