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연권·혐설권 박 성 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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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며칠 전 일이다. 「텔FP비전」을 보다가 지금 일본에서 일고 있다는<혐연권>운동에 관한「뉴스」를 보았다. 『담배 연기를 안 맡을 권리』를 되찾으려는 것이 이들의 운동 목표라는 것이다. 이 운동은 때마침 금년부터 세계보건기구(WHO)가 벌이고 있는 금연 운동에 발맞추어 시작된 모양인데, 이미 여러 나라에서 담배 안 피우는 사람의 권리를 위해 여러 가지 조치가 취해지고 있음은 우리도 갈 아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부터 고속 「버스」에 흡연석을 정해 담배 안 피우는 사람을 연기로부터 보호하려는 노력이 시작됐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시내「버스」를 타면<금연>이라 써 붙인 바로 앞에서 운전기사와 승객들이 거침없이 담배를 즐기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보게 된다. 요즘 부쩍『최고의 지성인』임을 자처하는 대학생들의 모임에 가 본적이 있다. <금연>이란 「사인」이 앞에 큼직하게 붙어 있는 강당 안에는 연기가 자욱하게 차 있었다.
밀폐된 장소에서 남이야 무슨 상관이냐고 담배를 피워 대는 강심장이 우리 주변엔 너무나 많다.
이런 비슷한 예는 한국의 신문들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아마 신문마다 두어 가지씩 연재하는 신문 소설일 것이다.
얼마 전이 바로 신문 주간이어서 언론의 자유와 책임을 내세운 행사들이 있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나라 신문들이 반성해야 할 점 가운데 하나가 연재 소설이 아닌가 한다.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연재소설은 언론인들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신문윤리실천요강」에 명백히 어긋난다.
그 요강 가운데 특히『외실 기타 부도덕의 과대한 보도로써 미풍양속을 저하시켜서는 안 된다』는 항목에 어긋나는 것이다.
물론 연재 소설은 보도 기사는 아니다.
그렇다고 대중 흥미 본위의 것이 신문이란 공기에 버젓이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까?
다시 「신문윤리실천요강」을 인용한다면 『공공의 이익과 대중의 호기심은 엄격히 분리되어야 한다』는데 말이다.
혐연권도 중요하지만 「협설권」도 있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이광수가 『유정』을 연재하던 60여년전과는 사태가 너무도 다르다. 그 때의 신문 연재소설은 계몽 기사보다 더 계몽적인 역할을 해냈다.
또 50년대까지에는 일부 소설가들의 후생을 위해 신문소설이 어느 정도 공헌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쪽의 공헌도 하지 못한다. 소설가들도 발표 기회가 얼마든지 있고, 외설 소설을 원하는 사람은 주간지나 기타 더 본격적인 것들을 값싸게 사 볼 수 있는 세상이다.
특히 자라고 있는 어린이들을 이런 공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간지들은 일제히 신문 소설을 없애는 문제에 대해 검토해 볼 때가 왔다고 본다. 그 지면은 좀 더 충실한 보도와 논평에 돌리면 바람직 할 것이다. 소비자 보호 단체들도 신문 독자의『소설 안 볼 수 있는 권리』에 눈을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외국어대교수· 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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