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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 화폐전쟁 … 한국 길을 잃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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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올 3~6월 한국 원화는 5.2% 올랐다. 한국은행이 주요 29개국 통화와 비교해 봤더니 상승폭이 가장 컸다. 가치가 떨어진 유럽 유로화(-0.6%)는 물론이고 일본 엔화(1.6%)나 중국 위안화(0.2%)와 견줘도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지나치게 가파른 원화 절상은 한국 경제의 견인차인 수출기업을 고사시킬 우려가 있다. 그렇지만 한국 정부나 한국은행은 속수무책이었다. 시장에서 달러를 사들이는 방식의 소극적 개입이 고작이었다.

 길을 잃은 원화. 그 이면엔 전 세계를 무대로 펼쳐지고 있는 통화전쟁이 자리 잡고 있다. 발단은 미국이 제공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후 미국은 천문학적인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월가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러나 1998년 외환위기 당시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강요당했던 아시아와 달리 미국은 달러를 찍어내 빚을 틀어막았다. 기축통화국이란 지위를 마음껏 이용한 셈이다. 눈치를 보던 유럽과 일본도 뒤늦게 가세했다.

 미국에 이은 유럽·일본의 파상적인 돈 풀기 공세에 원화는 무방비였다. 선진국 중앙은행이 ‘저성장·저물가’라는 뉴노멀(New Normal·새로운 경제질서)에 맞서 양적완화나 마이너스금리 정책 등 과거엔 상상할 수 없었던 비상조치를 동원할 때 한국은행은 14개월째 금리만 동결했을 뿐 무대책으로 일관했다. 연세대 김정식(경제학) 교수는 “한국 외환 당국은 전략이 없다. 포지션도 없다. 올 들어 원화 가격이 급속히 절상돼 수출기업이 아우성을 질렀을 때도 우왕좌왕하는 모습만 보였다”고 말했다.

 그 사이 중국이 굴기(?起·움츠렸던 몸을 일으킴)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그동안 숨을 죽여왔다. 역설적이게도 미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가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중국은 달러 패권에 도전장을 던지고 나섰다. 무역거래에서 위안화 비중을 높이는 정도가 아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등 새로운 국제금융기구 창설을 들고 나왔다. 44년 달러 패권 시대를 연 ‘브레턴우즈협정’의 두 기둥인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을 뿌리째 흔들겠다는 기세다. 공교롭게도 22일은 브레턴우즈협정이 체결된 지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70년 달러 치세가 본격적인 도전에 직면했다.

 서강대 조윤제(경제학) 교수는 앞으로 전개될 통화전쟁은 과거와 전혀 양상이 다를 것이라고 지적했다. “브레턴우즈는 유일하게 성공한 통화 회담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절대적인 권력을 갖게 된 미국이 43개 통화 다자체제에 상대적으로 포용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70년 전과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과거 미국과 같은 역할을 할 절대적 강자가 없다. 미국 달러화가 상당 기간 우위를 점하는 가운데 통화 다극화 체제가 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달러와 위안의 패권 싸움에 끼인 원화는 어디로 향해야 할까. 무차별 살포로 달러의 신뢰엔 금이 갔다. 그렇다고 위안 진영에 섣불리 가담했다간 후환이 두렵다. 중국의 도전이 거세지만 아직은 미국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다. 상당 기간은 위태로운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달러 위주인 보유 외환을 다변화하고 위안화와의 통화스와프(비상시 통화 맞교환 합의)를 확대하는 등 안전망 확충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해식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궁극적으로 적극적 경기 부양으로 내수 체력을 기르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조현숙·박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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