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금융의 삼성전자가 나오려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윤창현
한국금융연구원장

‘우리 금융산업에는 왜 삼성전자 같은 회사가 없는가’라는 지적을 들을 때마다 금융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러나 삼성그룹에 있는 많은 회사 중에서도 삼성 ‘전자’ 한 회사 빼고 나면 나머지 회사들은 모두 삼성 ‘후자’들이라는 항간의 농담을 상기해보면 삼성전자 수준을 달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느끼게 된다. 뼈아픈 지적은 이뿐만 아니다. ‘우리 금융산업 수준은 왜 선진국 금융 산업에 비해 항상 뒤처져 있나’라는 질문도 그렇다. 우리 금융산업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뉴욕·런던·싱가포르·홍콩의 금융산업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우리 금융산업은 국내적으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국내 제조업 분야에 비해 뒤처져 있고 글로벌하게는 선진 금융산업에 비해 뒤떨어져 있다. 국내 제조업과의 격차에다 선진 금융산업과의 격차라는 두 가지 격차, 소위 ‘쌍둥이 격차’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우리 금융산업의 현주소다. 게다가 빈발하는 사고 속에 신뢰를 잃은 데다 글로벌 위기의 원인이 된 금융산업 전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로 인해 엎친 데 덮친 듯 힘들어하고 허덕이는 모습마저 보인다.

 이렇게 된 데는 금융사의 잘못이 가장 큰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물 안 개구리’에 안주한 건 아닌지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하지만 금융산업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한 금융 당국의 규제도 또 하나의 큰 원인일 것이다. 사실 금융산업은 규제의 사슬에 묶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금융산업의 낡은 규제를 혁파하는 게 우리 금융의 살 길이라는 주장이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지난 10일 금융위원회가 내놓은 금융산업 규제 개혁 방안은 나름 의미 있는 작업이다. 과거처럼 ‘우는 아이 떡 하나 주듯’ 마지못해 규제를 푸는 방식이 아니라 ‘울든지 웃든지 아이를 잘 키워보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금융위는 ‘더 좋은 규제(better regulation)’를 큰 목표로 설정했다. 단순히 낡은 규제를 푸는 데서 나아가 규제의 성격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다. 실물 지원 기능 강화, 소비자 불편 해소, 금융회사의 새로운 기회 창출, 영업 자율성 확대, 숨은 규제 상시 개선, 감독 검사 관행 혁신 등 다양한 중간 목표를 설정하고 각각의 세부 목표를 세웠다. 금융 규제를 A부터 Z까지 들여다보고 고치겠다는 것으로 금융위 출범 이후 초유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복합점포 활성화, 개인자산 종합관리계좌 도입, 해외 진출 시 겸업주의 적용 등은 특히 눈에 띈다. 국내외 금융의 새 흐름과 변화를 잘 잡아낸 것들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금융산업은 금융 부채 조달 중심에서 금융 자산 운용 중심으로 급격히 변모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금융소비자들이 금융을 소비·활용하는 행태가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려 실물에 투자하는 방식보다 금융을 통해 자산을 축적·관리하고 노후를 준비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 점포에서 은행과 증권 상품이 같이 자문과 상담이 이뤄진다면 소비자들은 훨씬 더 편하게 자산을 관리할 수 있다. 종합자산관리계좌도 마찬가지다. 한 계좌에서 자신이 투자한 모든 금융 상품을 집중·관리할 수 있는 만큼 소비자 편익을 한층 높여줄 것이다. 국내 금융회사가 해외에 진출할 때 해당 국가가 겸업을 허용하면 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겸업주의 허용도 이런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규제 개혁 방안과 함께 내놓은 실물 지원 강화 방안도 주목할 만하다. 우수한 기술과 아이디어가 있으면 창업 때 3억원까지 지원하고 예비창업자에 대해 별도의 평가모형을 도입했으며, 유망 기업의 상장 활성화를 위해 시장 진입요건을 완화하는가 하면 실패 중소기업에 대한 패자 부활 기회를 확대하는 등의 방안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개혁안만으로 금융의 삼성전자가 나오리라고 기대하는 건 시기상조다. 하지만 이번 규제 개혁이 밀알이 돼 금융 경쟁력 강화로 이어진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도 “금융의 ‘삼성전자’는 왜 없느냐”는 질책만 말고 “금융의 ‘삼성전자’를 만들려면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되느냐”고 물어봐 주었으면 한다. 낙후된 금융산업이 금융인만의 문제나 책임이 아니라 우리 사회 모두의 책임이라고 인식할 때 금융의 삼성전자 탄생도 앞당겨질 것이다. 우리 금융산업을 ‘쌍둥이 격차’에 시달리는 일종의 ‘유치산업’으로 보고 이를 보듬고 키워주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번에 나름 의미 있는 금융 규제 개혁안이 나오게 된 데는 정권 차원의 규제 완화 분위기가 큰 도움이 됐다. 이런 기회를 잘 살려 금융 당국도 개혁안을 내놓은 데 그치지 말고 철저하게 실천해야 한다. 예전에도 숱하게 많은 규제 개혁안이 발표됐지만 내용 없이 립서비스로 그치거나 시늉만 내다 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번만은 그런 전례를 답습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윤창현 한국금융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