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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직의 바둑 산책] 신예들 소중한 실전 경험 … "바둑리그 못 끼면 기사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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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지난달 29일 열린 바둑리그 6라운드 승부 제5국에서 민상연(SK엔크린·오른쪽) 3단이 이세돌(신안천일염) 9단에게 반집을 이겼다. [사진 KB바둑리그]
한상훈(左), 이원영(右)

“어떤 공격도 배로 튕겨 내는 쿵푸 팬더다.”

 지난달 29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 1층 바둑TV 스튜디오. 올 상반기 KB바둑리그의 백미가 연출됐다. SK엔크린의 민상연(22) 3단이 신안천일염의 이세돌(31) 9단에게 반집을 이겨내자 팀 동료들이 감탄을 터뜨렸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승리였다. ‘팬더’는 40초 초읽기에 몰리면서도 이 9단의 공격을 100여 수나 막아내 승리를 거둔 민 3단의 별명이다. 몸무게 90kg의 거구와 여유 넘치는 성격 때문에 붙은 애칭이다.

 2014 KB바둑리그(이하 바둑리그) 상반기 일정이 20일 마감한다. 바둑리그는 젊은 기사들에게 희망과 기회의 장(場)이다. 기사들 사이에서 “바둑리그에 들어가지 못하면 기사가 아니다”라는 말이 회자할 정도다. 안성준(25) 5단은 “수입은 물론 실력 향상의 기회가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총상금 34억원의 바둑리그는 2004년 시작됐다. TV와 인터넷의 성장에 발맞추어 한국기원과 바둑TV가 만든 대회다. 갑·을·병조로 나뉜 중국리그에는 못 미치지만 활력은 그에 못지않다. 일본은 리그가 없다.

 바둑리그는 8개 팀 64명(팀당 8명)이 7라운드 더블 리그로 우승팀을 가린다. 감독은 한 라운드에 5명을 선수로 내세우니 출전 기사는 대회 기간 중 최대 14판을 둘 수 있다. 수입도 좋다. 이기면 한 판당 400만원(지면 70만원)을 받는다.

 각 팀 감독은 실력과 컨디션을 보고 시합에 5명을 선수로 내세운다. 이틀에 걸쳐 첫날 두 판, 이튿날 세 판을 두는데 이튿날은 3, 4국을 동시에 두고 5국은 3국이 끝난 직후 둔다. 장고바둑(제한시간 1시간30분) 세 판에 속기(제한시간 10분)가 두 판(3·5국이 속기)이다. 초읽기는 모두 40초 5회다.

 바둑리그에선 팀 성적이 첫째다. 소속 기사 간의 단결도 중요하다. 개인 위주였던 1960~90년대 바둑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 때문에 바둑리그는 뭔가 색깔이 뚜렷하지 않은, 목표 불분명한 기전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하지만 기사 개인의 발전은 물론 한국 바둑계의 실력 향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첫 번째 효과는 ‘기회’에서 온다. 김영삼(40·9단) 정관장 감독은 “기사라면 성적이 좋을 때 더 많이 두어야 실력이 는다. 바둑리그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감독은 성적이 좋은 기사를 계속해 시합에 내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대국 기회는 기사들에게 생명줄과 같다. 일찍이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1925~2009) 9단은 “실전에서 이겨봐야 비로소 안다. ‘아, 나도 이겨보는구나. 별거 아니네’라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기회의 중요성을 설파했었다.

 바둑은 상대의 이름에 주눅이 드는 놀이다. 이세돌 9단이 ‘이창호 프리미엄’ 현상을 제기했던 이유다. 한창 바둑에 물이 오른 20대 초반에 이 9단은 “상대를 주눅들게 하는 ‘이창호라는 이름’을 이겨내야 한다”고 자신을 다그쳤었다.

 후지사와는 “바둑 공부는 20대 초에 끝난다”고 강조했었다. 그렇다면 늦어도 20대 초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바둑리그는 실력과 자신감으로 무장된 기사라면 언제나 감독이 선수로 중용하는 기전이다. 결승에나 올라야 만날 수 있는 일류 기사들을 초단이라도 만날 수 있는 대회다.

 두 번째로 바둑리그는 승부사 기질로 표현되는 배짱을 길러주고 있다. 예컨대 팀이 0대 2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제3국에 나서면 심리적 부담이 크다. 그것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감독이 팀원들의 컨디션은 물론 성품까지 세밀히 파악하는 이유다. 1·2장은 주로 컨디션 좋은 기사로, 3·4장은 배짱이 좋은 기사로, 5장은 경험 많은 기사로 낙점한다. 기사들도 배짱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자신의 1승과 1패가 팀에 미치는 심리적 효과를 점점 알아가고 있다.

 세 번째 효과는 기사들의 절제 능력 향상이다. 국가상비군에서 단체생활을 하는 젊은 기사들이 생활의 절제를 배우듯이 바둑리그도 그렇다.

바둑리그는 기사들에게 ‘팀’이라는 사회에 자신을 적응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김성룡(38·9단) 포스코켐텍 감독은 “개인주의에 빠진 기사들은 대부분 생활도 무절제한 경향이 있다”면서 “바둑리그가 한국 바둑의 경쟁력 강화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했다.

기회가 큰 만큼 신예들의 성과도 좋다. 상반기 성적 1~10위에 오른 기사 중에 한국 랭킹 10~30위의 기사가 4명이었다. 6전 전승으로 1위에 오른 한상훈(22) 7단도 랭킹은 25위에 불과하다. 바둑리그에선 성적이 좋으면 감독이 밀어준다. 격려받은 기사는 일류 기사를 상대하면서 실력을 다진다. 실력 향상과 심리적 부담의 극복이 상호 작용하는 전형적인 과정이다.

 물론 바둑리그에 긍정적 효과만 있는 건 아니다. 성적이 나쁘면 소속 팀 동료들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떨치지 못해 부조(不調)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 이번에 1승 6패로 전반기를 마감한 나현(19) 4단은 팀이 1지명으로 뽑은 기사였다. 하지만 팀의 리더가 되라는 부담을 이겨내지 못했다. 유창혁(48) 9단이 “어린 선수를 경험이 필요한 1지명으로 발탁한 것은 팀을 위해서나 본인을 위해서나 문제가 없지 않다”고 안타까워할 정도다.

 바둑리그는 8개월 동안 모두 290국을 소화한다. 애기가는 물론 기사 자신에게도 공부가 된다. 하지만 참가 기사는 한국기원 소속 기사 290명 중 64명으로 5분의 1을 약간 넘는다. 그 때문에 참가 기사와 참가하지 못한 기사의 기력 향상 기회에 차이가 크다. “바둑리그에 참가하지 못하면 기사가 아니다”라는 말이 리그 밖의 기사들에겐 자조적인 어조가 되는 이유다. 바둑리그 하반기 시합은 다음 달 7일 시작한다.

문용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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