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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충기 부장의 삽질일기] 강남에서 삽질 5년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몇 년 전에 바꾼 밀짚모자 챙이 다시 해지기 시작했다. 얇아진 장화는 언제 구멍이 날지 모른다. 청소를 해도 차 트렁크엔 언제나 흙덩이가 굴러다닌다. 손가락을 세워 머리를 박박 감아보지만 손톱 밑에는 툭하면 흙때가 낀다.

대충 헤어보니 주말농사 15년째다. 웬만큼 일에 익숙해졌지만 밭에 가는 날 새벽엔 그래도 설렌다. 내가 삽질할 수 있는 날은 토요일뿐이다. 여느 직장과 달리 일요일에 출근하기 때문인데, 조간신문 기자의 숙명이다. 일이 쏟아지는 오뉴월이면 일요일 새벽에도 밭에 들렀다 출근하기도 한다.

- 몇 평이나 짓나요?

주말농장을 한다면 열 명 중 아홉 명은 이렇게 묻는다.

- 그것 밖에 안 돼요?

5평 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또 열 명 중 아홉 명은 이렇게 답한다.

땅이 작아도 일은 적지 않다. 열 평 농사나 만 평 농사나 손 가는 건 마찬가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한강 하류 일산에 오래 살았다. 뛰는 집값을 잡으려 뚝딱뚝딱 만든 신도시의 초기 모습은 엉성했다. 분양이 되지 않았거나, 분양 뒤에도 방치해 둔 땅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이사 가 보니 집 앞에 엄청나게 너른 땅이 있지 않은가. 쾌재를 불렀는데 세상에 내가 부처 먹을 땅은 한 뼘도 없었다. 건물을 짓지 않고 놔둔 상업용지를 근처의 주민들이 알뜰하게 일구고 차지하고 있었다. 농사를 짓는 이들은 대부분 노인이었다. 이들을 부양하는 젊은 자녀들은 이른 아침 서울에 있는 직장으로 밥을 벌러 갔을 터였다. 노인들은 대개 시골이 고향이겠는데, 텃밭은 이들에게 아파트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고 친구들을 만나는 놀이터였다. 노인들의 한축은 은퇴하고 서울의 변두리로 물러나온 이들이었다. 황량하던 땅은 이들 덕에 잠깐 사이에 녹색의 바다가 됐다.

다음해 봄, 집 근처를 산책할 때였다. 큰 길 건너에는 길고 긴 농수로를 따라 주민들이 일군 좁은 밭들이 이어져 있었다. 사월이 지나서도 일구지 않는 땅이 있기에 혹시나 하여 씨를 뿌렸다. 늦게라도 임자가 나서면 돌려줄 생각이었다. 주인은 나서지 않았고 그 옆의 땅까지 빈 걸 알고는 함께 부쳤다. 이십여 평은 족히 됐다. 수로 옆에 머루나무와 인동덩굴도 심었다. 그렇게 몇 년을 흙 만지며 잘 놀았는데, 어느 날 시에서 그 땅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나무를 심어버렸다. 2년을 키운 도라지가 막 새싹을 내던 봄날이었다. 파헤쳐진 밭 여기저기에 손가락만한 도라지가 무참하게 잘려 흩어져 있었다. 허탈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거둬온 도라지들을 아파트 베란다 화분에 심어봤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그 해를 놀며 보내니 견디기 어려웠다. 다음해 농협을 통해 다섯 평짜리 주말농장을 얻었다. 그새 나는 다시 이사를 했고, 밭은 집에서 자전거로 이십 여분 걸렸다. 몇 년을 의지하며 지낸 이 밭을 두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서울로 들어왔다. 마음이 무거웠다. 더는 농사를 지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혹시나 해서 알아보니 웬걸, 서울 한복판 강남에 주말농장이 있지 않은가. 지금 농사짓고 있는 땅이다. 내 밭은 구룡산 밑 그린벨트 안에 있다. 산자락에 폭 파묻혀 있어 도시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 여기서 5년째, 지금의 밭은 3년째다. 올해는 가까운데 사는 친구 셋과 20평을 함께 짓는다.

올 봄에는 20여 가지 채소의 씨를 뿌렸다. 풀이 자라기 전인 4월말과 5월초에는 쑥 뜯으러 홍천 쪽으로 다니는데 올해는 바빠 가지 못했다. 밭 뒤 산자락에도 깨끗한 쑥이 많이 있으니 멀리 갈 이유도 없어졌다.

여름이 힘들다. 더위를 피해 새벽에 일하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땀범벅이 된다. 땀 냄새가 날리면 풀숲에서 모기떼가 야차처럼 달려들고 피부는 금세 벌집이 된다. 주린 놈들은 두꺼운 옷 속까지 침을 박아 넣는다. 놈들과 싸우며 여름이 간다. 그렇다고 한주라도 일을 거르면 밭은 금세 절단난다. 하지 전후에 감자를 캐고 장마 지나 8월말이면 김장거리를 심는다. 서리 내리면 한해 농사도 끝이다. 삽질하며 땀 흘리면 일주일이 개운하니 궁합은 농사에도 있음이 틀림없다.

신도시는 그새 헌도시가 되어 가고, 돌아갈 기약은 가물거린다.

안충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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