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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속 그 이야기 <51> 경북 포항 내연산 숲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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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내연산 숲길은 계곡물을 끼고 걷는 길이다. 길을 걷던 여성들이 관음폭포 앞에서 어린이처럼 첨벙첨벙 물장난을 하고 있다.

무더위와 장마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 이 시원한 길을 소개한다. 경북 포항의 내연산 숲길 청하골 코스다. 걷는 내내 계곡물 소리가 귓전을 떠나지 않고, 폭포 12개가 쏟아지는 장쾌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체증이 가시는 길이다. 조선시대 화가 겸재(謙齋) 정선(1676~1759)이 이 길에서 폭포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풍경에 홀린 일화도 전해 내려온다. 내연산 숲길은 지난해 포항시가 일부 등산로를 정비하고 12.8㎞ 길이의 길을 다지면서 어엿한 트레일의 모습을 갖췄다.

내연산 숲길 하면 12개 폭포가 유명하지만, 모든 폭포가 길가에 있는 건 아니었다. 어떤 폭포는 트레일에서 300m 이상 벗어나 있었다. 그래도 week&은 12폭포를 모두 만나러 길 아닌 곳까지 찾아 들어갔다.

글=최승표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보경사부터 걸으면 가장 먼저 만나는 상생폭포.

천년고찰 뒤편으로 흘러드는 물줄기

내연산 숲길은 보경사에서 시작한다. 12.8㎞ 길이의 계곡길이 트레일로 완성된 것은 지난해 8월이지만 이 길은 유서 깊은 명승지였다. 정선의 그림 ‘내연삼용추도’, 정시한(1625~1707)의 『산중일기』에 등장하면서 내연산 들어가는 길은 예부터 인적이 끊이지 않았다.

불교에서는 보경사를 품은 내연산을 성지로 여기고 있다. 신라 진평왕 25년(602년)에 창건된 천년고찰 보경사는 산자락과 계곡 곳곳에 암자를 두고 있다. 보경사 자체가 내연산의 일부로 완전히 스며든 모습이었다. 12개 폭포 중에도 불교와 관련한 이름이 많아 폭포를 드나드는 길을 ‘보경사 성지순례코스’라 부르기도 한다.

“운이 좋네예. 아래께(그저께) 비가 60㎜ 내리가 폭포가 아주 장관이라예.”

보경사 앞 매표소 직원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숲길에 들자마자 역동적인 물소리가 들려왔다. 솨, 솨. 소리만 들어도 청량감이 전해졌다. 이 길의 종착지인 경상북도수목원에 도착하고서야 깨달았다. 길을 걷는 내내 물소리가 한시도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보경사에서 출발해 서운암을 끼고 돌자 큼직한 보가 나타났다. 조선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도 내연산 자락 14개 마을이 계곡물과 보를 활용해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이 물줄기는 산아래 마을을 먹여 살리는 젖줄인 셈이었다.

조붓한 내연산 숲길을 걷다가 문수암 쪽으로 올라가 봤다. 300m쯤 비탈을 타고 오르자, 굽이치는 산세와 깊은 계곡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에 두 줄기 폭포가 화룡점정을 찍었다. 상생폭포였다. 용한 기도처로 알려진 때문일까. 문수암 가는 길에는 이른 아침부터 기도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열병을 앓는 갓난아이를 둘러업고 온 여인도 있었다.

멀찍이서 내려다봤던 상생폭포를 찾아 다시 내려왔다. 계곡물이 사자 머리 모양의 바위 좌우로 갈라졌다. 원래는 쌍둥이폭포라 하여 ‘쌍폭’ ‘쌍생’으로 불렀는데, 최근 들어 ‘상생’이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르면서 이름을 바꿨다 한다.

①내연산에는 바위에 이름을 새긴 각자가 300여 개 있다. ②실타래처럼 흐르는 실폭포. ③12 폭포 중 가장 낙차가 큰 연산폭포.

겸재가 반한 폭포와 기암괴석

상생폭포를 지나자 보현폭포가 나타났다. 보현암 아래쪽에 있는 폭포로, 길이 왼쪽으로 90도 꺾이는 지점에 숨어 있었다. 계곡물이 기암괴석 사이로 굽어 흐르는 S자 모양이었다. 바위 뒤편에서 용이 꿈틀거리며 나오는 듯했다.

내연산 숲길은 정비작업을 마쳐 길이 잘 나 있다.

보현폭포를 지난 뒤부터는 폭포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삼보폭포와 잠룡폭포는 아담했다. 잠룡폭포는 등산로에서 잘 보이지 않았고 접근도 쉽지 않았다. 정작 폭포의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잠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떠올릴 만큼은 아니었다.

바람이 잘 들지 않는다는 무풍폭포를 지나자 그림 같은 풍광이 펼쳐졌다. 관음보살에서 이름을 딴 관음폭포는 12개 폭포 중 으뜸으로 꼽힐 정도로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암벽이 병풍처럼 치솟아 있고 두 갈래 물줄기가 쏟아지는 폭포 주변으로 굴 여러 개가 뚫려 있었다. 수도승이 기도를 했다는 관음굴도 폭포 곁에 있었다.

관음폭포 위에 있는 구름다리를 건너자 내연산에서 가장 낙차가 큰 연산폭포가 나타났다. 이틀간 내린 비로 폭포는 육중한 소리를 쏟아냈다. 폭포 주변 바위에는 글자를 새긴 각자(刻字)가 많았는데, 정선의 흔적도 있었다. 갑인추 정선(甲寅秋 鄭<6B5A>). 즉 갑인년(1734년) 가을에 왔다는 뜻이다. 내연산 바위에는 이름 300개가 새겨져 있다는데, 정선의 각자는 기생의 것보다 작고 희미했다. 그는 내연산 자락 청하의 현감, 지금으로 치면 면장쯤 되는 지위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산수(山水)를 그리는 화가로서,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차린 것이었으리라.

길이 험한 일부 구간에 데크로드가 깔려 있다.

정선은 잠룡폭포과 관음폭포, 연산폭포에 홀려 ‘내연삼용추도(內延三龍湫圖)’를 남겼다. 한데 실제 풍경은 그림과 다르다. 폭포 세 개는 결코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기서 정선이 발전시킨 진경산수화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정선은 풍경을 그대로 모사하는 실경산수화와 달리 작가의 상상력을 가미한, 당대의 획기적인 화법을 선보였다. 그러니까 내연산의 폭포는 정선의 상상력을 끌어낸 비경 중의 비경이었다.

국내 최고 수목원에는 망개나무 군락이

산책은 여기까지였다. 구름다리를 되돌아와 관음폭포 옆으로 난 나무계단부터 길이 가팔라졌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됐다. 등산객 대부분이 관음폭포와 연산폭포만 보고 발길을 돌렸다.

데크로드가 끝나자마자 폭 20m, 무릎 높이의 물을 건너야 했다. 신발을 벗었다. 맨발이 물에 닿자마자 어는 듯했다. 돌이 미끄럽고 뾰족해 발가락에 잔뜩 힘을 줬다. 물살이 거세 중심을 잡기도 쉽지 않았다. 기어이 도하 성공. 햇볕에 발을 말린 뒤 은폭포 쪽으로 걸어갔다.

여기서부터는 사람이 많지 않고, 안내 표지판도 드물어 길을 찾기 어려웠다. 등산객이 걸어놓은 리본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연산폭포에서 1㎞를 걸어서야 은폭포가 나타났다. 여성의 음부를 닮았다 하여 예부터 음폭(陰瀑)이라 불렀으나 조선시대에 이름이 상스럽다며 은폭(隱瀑)으로 고쳐불렀다. 이름은 바꿨지만 음기는 강했다. 폭포 주변은 나무가 우거져 유난히 음습했다. 이 일대 골짜기 이름도 ‘음지골’이었다.

실폭포·시명폭포는 숲길만 오롯이 걷는다면 지나칠 녀석들이었다. 하나 비가 많이 내려 충분히 볼 만하다는 포항시청 직원의 말만 믿고 찾아갔다. 실타래를 풀어놓은 것처럼 여러 가닥의 물줄기가 쏟아지는 실폭포는 단연 장관이었다. 겸재가 이 폭포를 만났더라면 반드시 붓을 들었을 터였다.

1960년대까지 화전민이 살던 시명리로 들어서자 계절이 바뀐 듯했다. 푹신한 낙엽길을 걷다가 계곡을 좌우로 넘나들었다. 어느덧 삼거리에 닿았다. 삼거리부터 경상북도수목원까지 약 4.2㎞는 임도라 고속도로나 다름없었다. 볕이 잘 드는 길이어서, 계곡에 바짝 붙어 걷던 이전과 사뭇 풍경이 달랐다. 길섶에는 산딸기가 영글었고 개망초꽃이 가슴 높이까지 자라 있었다.

드디어 경상북도수목원이다. 한국 최고지대(650m)에 자리한 수목원답게 다양한 고산식물과, 쳔연기념물이자 내연산 깃대종인 망개나무 군락지를 볼 수 있었다. 울릉도의 자연환경을 재현한 식물원, 습지로 조성한 창포원도 흥미로웠다. 마지막으로 전망대에 올랐다. 너울거리는 산세와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제껏 만난 폭포만큼이나 시원한 풍경이었다.

길 정보=서울시청에서 보경사까지 약 5시간 걸린다. 대구포항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학전IC에서 빠진다. 보경사는 포항시청에서도 멀다. 30㎞ 거리로 자동차로 50분 가까이 걸린다. week&은 보경사에서 출발해 경북수목원까지 걸었다. 반대 방향으로 걸어도 된다. 보경사로 들어가려면 입장료 2500원(어른)을 내야 하지만 경북수목원 입장은 무료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수목원에서 출발해 보경사로 나오는 게 낫다. 포항 청하면사무소에서 수목원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 세 번(오전 7시10분, 11시25분, 오후 5시) 뿐이지만 보경사에서는 매시간 버스가 있어 하산 후 이용하기 좋다. 내연산 숲길을 다 걷는 데는 5~6시간이 걸린다. 등산로에서 떨어진 폭포를 찾아가지 않았을 경우다. 포항시청 도시녹지과 054-270-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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