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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5)제66화 화교|취천루 4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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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화교들은 47년째 호떡집만 하고있는 취천루(서울명동)를 화교사회가 자랑하는 명물의 하나로 꼽고 있다. 취천루주인 왕금새씨 (82)가 한국에 온것은 18세때인 l915년이었다. 왕씨는 한국으로 옮겨 처음에는 의정부에서 야채장사를 시작했다.
야채장사래야 처음엔 행상이었다. 농가에서 물건을 받아다 새벽부터 지고 다니며 팔아야하는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18세의 왕씨는 어려움과 외로움을 참으며 열심히 일만 했다.
3년쯤 지나 가게를 차릴만큼 자리가 잡히자 왕씨는 고향 산동 수광현에 들어가 당시 아홉살이던 동생 금화씨를 데리고 나왔다.
두 형제는 함께 야채장사와 호떡장사를 시작했다. 9세짜리 어린 금화씨도 야채를 팔고 호떡을 빚는등 한 사람몫을 거뜬히 해냈다.
이후 왕씨는 부지런히 돈을 모았다. 이때 벌써 20세를 넘겼지만 결혼은 생각도 못했다. 이러기를 10년. 서울에 가게를 차릴수 있을만한 돈을 저축한 왕씨는 1928년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결혼을 하기위해서였다. 이때 왕씨의 나이 31세였으니 당시로선 대단한 만혼이었다.
고향에서 고른 색시감은 16세의 어린 처녀였다. 지금의 부인 양씨다. 혼례를 마치고 얼마후 왕씨는 다시 홀몸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가게터를 물색하던 왕씨는 1932년 현재의 위치(서울명동 1가76·「코스모스」백화점 맞은편)에 취천루를 개업했다. 지금은 서울의 중심가가 됐지만, 당시만 해도 가장 중심가는 충무로일대였고 이곳은 변두리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사들인 취천루건물은 15평짜리 2층집으로 지금까지도 그대로 쓰고있다. 1층은 호떡집, 2층은 살림방으로 꾸몄다.
가게를 차린 왕씨는 곧 부인을 불러왔다.
부인은 호떡과 만두를 빚고, 왕씨는 주방일과 손님시중, 계산대일을 도맡았다. 여기에 아침마다 야채행상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종업원은 두지 않았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또순이부부」였다.
열심히 일한데다 호떡과 만두맛이 일품이어서 취천루는 곧이름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고객의 대부분이 청소년과 학생, 특히 젊은 여자가 많았다.
장사가 잘 되면서 일손도 바빠졌지만 가족끼리 모두 해냈다. l935년에 태어난 맏아들 청징씨를 비롯한 5남매가 모두 종업원 노릇을 했다. 그렇다고 공부를 게을리한 것도 아니었다. 위의 두아들은 고교를 마쳤고, 그밑의 3남매는 대학이상을 졸업했지만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모두 가게일을 도왔다. 대만에서 대학을 마친 3남 청담이나 이대를 나와 미국에서 사는 딸 청난, 역시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고있는 막내아들 청위등도 모두 호떡·만두를 만드는 솜씨가 기술자 이상이다.
나의 아들또래인 청담의 얘기로는 9세때부터 호떡을 빚고 불을 때야하는등 일이 많아 어린 마음에 학교가 끝나면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는 것이다. 이 청담이 지금은 화교학교 화학교사를 하면서 몸이 불편한 아버지 대신 가게일을 맡고 있다.
지금도 퇴근만 하면 주방에서 직접 만두를 찌고「홀」에서 손님접대에 행주질까지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 셈이다.
개업이후 근 반세기동안 취천루의 호떡맛은 장안에서 유명했다. 요즘도 가끔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40여년전 학생시절에 먹던 취천루의 호떡맛을 잊을 수 없다며 찾아오곤 한다.
호떡뿐 아니라 만두도 한국에서 가장 오래 했을뿐 아니라 가장 맛있게 만든다고 왕씨는 자부한다. 특히 대만식 군만두라 불리는 과첩(고틴)은 국내 유일하게 만든다. 만두도 취천루특유의 재료나 조리법이 있는데, 이 비법은 외부인에겐 절대공개 않는것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인기가 있으면서도 왕씨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이제는 화교사회의 원로가 된 왕씨를 주위에선 「욕심없는 사람」으로 존경하고 있다. 그가 돈에 욕심을 냈다면 벌써 큰돈을 모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왕씨는 「과욕은 금물」이라는 생각으로 절대로 무리를 하지 않았다.
가게도 최근 겉모습을 약간 바꿨을뿐 47년전 그대로다.
아래층에 탁자5개, 지극히 작은 「홀」이었지만 손님이 줄을서서 기다려도 가게를 넓히거나 옮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왕씨의 생활신조는 「신용」하나였다. 아직도 한국말을 잘못하는 왕씨부부가 성공한 것은이 신용하나로였다. 재료인 밀가루나 고기의 구입처도 30년이상 한곳과만 거래하는데다 절대로 외상을 지지않았다. 모두「현금거래」였다. 구입처도 요즘엔 거리가 멀어져 자녀들이 가까운 곳으로 바꾸자고 권고했지만 신용을 내세우며 바꾸지 않는다고 들었다.
유감스럽게도 최근 취천루는 호떡을 그만두고 만두 전문점으로 바뀌었다. 도심가에서 연탄사용은 못하게한 당국의 조치 때문이다. 겉모습도 약간 현대적으로 고치고 탁자수도 10개로 늘렸다. 반세기만에 탈바꿈을 시작한 셈이다.
붙박이로 반세기-. 몇달 후면 왕씨의 자손이 태어나 4대가 이작은 집에서 호떡을 팔아 지내온 셈이된다. 이 고집스러움에서 화교의 한 전형을 엿볼 수있다. 끈기있고 근면하게 과욕을 부리지않고 살아온 중국인의 한 모범을 보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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