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한자병용 고집하면 잃는 것 많아|자랑스런 한글 전용했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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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에도 글이 따로 있나요, 아니면 중국어나 일본어를 사용하나요?』외국여행 중에 흔히 받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신바람이 나서 설명을 합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글인 「한글」을 사용하고 있어요. 이는 이씨 왕조 제4대왕인 세종대왕께서 15세기에 창제하신 24개의 모음과 자음으로 된 표음문자이지요. 배우기 쉽고 조직적이며 아름답고 음악적인 글로 많은 언어학자들이 이 한글을 세계에서도 뛰어난 글이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또 한글은 가로나 세로 어디로도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손에 들고 있던 한국신문이나 책을 보고는 『그런데 글자는 굉장히 어려워 보이는군요. 아니 이것은 중국글자 같군요』라는 말을 들을 때면 저는 머리가 아찔해옴을 느끼곤 합니다.
이런 일들을 몇 번 겪고 난 뒤로 저는 외국여행때는 꼭 한글로만 된 책 한 권을 갖고 다닙니다.
한번은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외국청년과 이야기를 하다가 명함교환을 하게되었습니다. 이 청년은 명함에 있는 저의 한자이름을 보더니 「싱가포르」의 「이」수상과 어떤 혈연관계라도 있느냐며 왜 한글을 두고도 한자이름을 쓰느냐고 물어와 이를 설명하느라 곤욕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글」만이 우리글이라고 떳떳이 말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한글을 자랑하면서도 한편 한글을 욕보이며 살아온 셈입니다. 이는 우리글이 「한글+한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글날을 맞아 우리는 왜 그 어려운 한문을 버리지 못하는가고 자문해 봅니다. 한문이 「진서」라는 의식, 한문을 많이 알아야 유식한 사람이라는 의식, 한문이라야 이해가 빨리 간다는 의식들을 버릴 수는 없는 때문이 아닐까요. 이들 의식때문에 우리의 한글은 수백년이 지나도록 완전히 제 빛을 못 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문 문화권에 사는 우리로서는 한글만의 사용은 당분간은 불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세대나 다음세대가 이런 불편을 조금만 참는다면 뒷날 큰 불편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도 글을 쓰는데도 한문을 섞어 쓰는 것이 습관으로 되어있습니다. 습관에 젖어 안이함을 택해 더 큰 것을 잃는다면 이는 우리민족의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한국의 문맹률은 10%미만인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이는 한글해독자를 기준으로 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국한문혼용의 불편없는 문자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한다면 문맹률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한문을 고집하는 습관에서 벗어나 한글만을 쓰는데서 오는 어려움들은 하나하나 개선해 나가야할 것입니다.
1년에 안되면 5년에, 5년에 안되면 10년이 걸려서라도 해결해 나가야합니다. 한문세대의 불편만을 생각해서 끊임없이 이어나갈 우리민족의 장래를 한문획수로 묶어둘 수는 없는 일 입니다.
이기태(KOR-SLAMCOMMERCIAL.Co., LTD 상무이사·서울대 교육대학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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