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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다 ‘탈선’ 패션은 그의 운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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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호 14면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국 디자이너.’ 요즘엔 이 정도 타이틀이 대수롭지 않다. 뉴욕 자체가 워낙 들고나는 무대인데다, 현지에서 호평받는다는 국내 디자이너들이 언뜻 떠올려도 너덧 명은 넘기 때문이다.

‘뉴욕 패션계의 차세대 블루칩’ 디자이너 양유나

양유나(35)는 그럼에도 여전히 주목할 인물이다. 2010년 현지에서 ‘유나 양(YUNA YANG)’이라는 브랜드를 만들고 뉴욕패션위크에서 첫 컬렉션을 열었던 그는 출발부터 남달랐다. 첫 컬렉션이 미국 패션 전문지 ‘WWD’의 커버(아래 작은사진)로 등장했다. 당시 기사는 “소재, 조직, 색조의 미묘한 혼합과 단순한 형태미의 영리한 대조를 보여주는 완벽한 예가 유나 양의 작업에서 나왔다”고 격찬했다. 바이어들도 빠르게 반응했다. 디자이너 나르리소 로드리게스를 발굴했던 편집숍 ‘데로라 스미스’와 신생 브랜드를 키워내는 소호의 편집숍 ‘데뷰’에서 러브콜이 이어졌다.

숨가쁜 4년이 지난 지금, 그는 ‘뉴욕 패션계의 차세대 블루칩’으로 꼽힌다. 고급 레이스 소재에 전통적인 쿠튀르(고급 맞춤복) 기법을 접목시킨 디자인이 대표 아이템이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바비 브라운과 ‘투데이쇼’의 앵커인 앤 커리 등 유명인들이 그의 옷을 찾는다.

최근엔 대만·중동 등에 이어 조금씩 국내로의 역수출을 꾀하는 중이다. 지난해 갤러리아백화점에 문을 연 팝업스토어가 크게 성공하면서 갤러리아에 정식으로 입점했고, 올 가을부터는 롯데백화점 애비뉴엘과 부산 센텀점에서도 그의 옷을 볼 수 있다. 최근 잠시 서울에 들른 그와 마주 앉았을 때 그는 인상적인 한 마디를 남겼다. “한국 디자이너가 아닌 한국 출신 글로벌 디자이너가 돼야 하지 않겠어요?”

이탈리아서 카페서 주문하다 패션의 길로
승승장구하는 비결을 물었을 때 답은 “어찌어찌하다 보니”였다. 한데 얘기를 들을수록 그냥 흘러간 일은 없었다. 패션에 발들인 것부터가 그랬다.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졸업을 하고 나서야 어학연수를 결심했다. 그리고 뻔한 영어권이 싫어 이탈리아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가서 반 년이 지나던 어느 날, 그는 ‘귀인’을 만났다. “카페에서 이탈리아어로 커피를 주문하는데 한 할머니가 말을 걸었죠. 동양인이 자기네 말을 하는 게 신기했나 봐요. 같이 수다를 좀 떨고 나니까 할머니가 그러데요. 자기가 20년 간 일했던 발렌티노(이탈리아 쿠튀르 디자이너)의 공방에 가지 않겠느냐고.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던 그곳, 정말 신세계였어요. 마음을 정했죠. 옷을 배워보겠노라고.”

이후 이탈리아 명문 패션스쿨인 ‘마랑고니’를 졸업했지만 취업은 쉽지 않았다. 석 달 동안 300여 통이나 되는 이력서를 보냈다. 그러던 차에 ‘프리마 클라세’에서 한 번 와 보라는 연락이 왔다. 당시 수석 디자이너는 양씨의 포트폴리오 속 원피스 원단이 자기가 다음 컬렉션에서 쓸 소재와 똑같아 놀랐다며 흔쾌히 입사를 허락했다.

명망 있는 패션하우스의 텃새는 녹록지 않았다. 울고 짜는 날이 이어졌다. 이를 지켜 본 한 선배가 조언을 했다. 언젠가 너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면 밀라노를 떠나라고. 여기는 신진이 클 수 없는 곳이라고. 그는 주저 없이 영국으로 짐을 쌌다. 런던 ‘세인트 마틴 스쿨’에서 여성복을 배우기 시작했다.

졸업 즈음 다시 막막해졌다. ‘서른에는 내 브랜드를 하겠다’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2007~2008년 경기는 최악이었고, 그는 뉴욕으로 터전을 옮기기로 마음 먹었다. 그 사이 미국에까지 세계적 불황이 닥쳤지만 ‘진짜 능력이 있다면 뭐라도 나오겠지’라는 오기가 발동했다.

캐주얼 대세인 뉴욕에서 쿠튀르 감성 발휘
브랜드를 만들고 첫 컬렉션은 1920년대를 배경으로 삼았다. 레이스를 ‘사모님 룩’이 아닌 다양한 방법으로 변신시켰다. 4~5가지 색깔을 오묘하게 결합해 유화 한 점처럼 회화적 요소를 살려냈다. “한없이 여성스러운 소재지만 커팅만큼은 과감하게 했어요. 게다가 캐주얼이 대세인 뉴욕에서는 완전 튀는 요소들이었죠. 옷만 보면 이건 유럽의 백인 동성애 남자가 디자인한 것 같다는 소리도 여러 번 들었어요.”

‘대충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싶은 자만이 생겼던 세 번째 컬렉션. 그는 패션계의 매운맛을 제대로 봤다. 친구처럼 지내던 기자들마저 “양은 끝났다”는 식의 혹평을 했다. 방황이 시작됐지만 기회는 다시 왔다. 영화 ‘워터 포 엘리펀트’ 제작사 측이 여주인공 의상을 맡아달라고 제안한 것. 작품의 시사회에 온 할리우드 스타들은 그의 옷을 입고 맨 앞줄 좌석에 앉아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어차피 한 번 맞을 매였다면 초장에 확실히 맞은 게 다행이었다”며 그는 당시를 회고했다. “패션계가 얼마나 무서운데요. 확 오르는가 싶어도 언제 훅 떨어질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전 전성기가 아주 늦게, 디자이너 말년이었으면 좋겠어요.”

‘영 발렌티노’ ‘리틀 알라이야’가 목표라는 그는 오트 쿠튀르적 디자인 감성을 언제까지나 유지하고 싶단다. 그래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지금, 직원들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제가 무뎌지면 어떻게든 자극해달라고, 돈 좀 벌겠다고 아무거나 욕심내면 제발 좀 말리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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