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법」은 있어도 「저런법」은 없다는건 잘못기성관념에 얽매이지말고 생활의 슬기 계발하는 "융통성" 아쉬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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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외국여행을 하다보면 으례 나라마다 생활양식이나 풍물이 다른데서 곧잘 내나라 내사회와를 견주어보기 마련이겠다. 미국에서 1년 좀 넘게 생활할 기회가 있던차에 뜻하지 않았던데서 재미있는 생활체험을 했다. 우스꽝스러우나 그것은 수도꼭지에 관한 것이다. 주방이나 화장실이 있는 곳에는 대개 수도시설이 있거니와 미국에서 본 수도꼭지는 종류가 무척 다양해서 처음 접하는 사람으로서는 어리둥절하게된다.
우리들 가정에서 쓰는 수도꼭지는 흔히 냉수와 온수의 꼭지가 각각 따로 설치되어 있고 또 왼쪽으로 틀어야 물이 나오기 마련 아닌가.
이에 비해서 미국에는 각 가정에서나, 더우기 학교·병원·「호텔」 등에 따라서도 전혀 다른 경우가 많다.
예컨대 어떤 수도꼭지는 눌러야 나오고, 어떤 것은 뽑아야 나오고, 어떤것은 옆으로 비틀어야나오고, 어떤것은 돌려야 나오되 잠시후 자동으로 멈추기도 한다.
더우기 당황한 것은 냉수와 온수가 한 수도꼭지에서 조종하기에 따라 나오기 때문에 서투른 솜씨로서는 추운겨울에 냉수욕이나 해야할 판이다.
말로만 듣던 선진국이라더니 과연 수도꼭지서부터 사람 골탕먹이는구나 싶어 고소를 지었거니와 그후 미국을 처옴 방문하는 동포를 만나는 경우에는 곧잘 이 얘기를 하면서 웃음을 나눈다.
시간이 좀 지나 이같은 여러가지 모양의 수도꼭지에 곧 익숙해지면서 이런 생각을 문득 하였다. 수도꼭지를 반드시 왼쪽으로 틀어야 할 까닭이 어디 있는가.
익숙해지기에 따라서는 뽑는 것이건 비트는 것이건 윈쪽으로 돌리는것 못지않게 펀리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일률적으로 단조로운 작동법에서 벗어나 좀더 이색적이고 심미적 특색도 살리는 다양화도 좋지 않은가 싶었다.
이 수도꼭지에 대한 체험은 나의 완고한 기성관념 내지는 고정관념을 다시 한번 반성케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법이 있나라는 반성적 회의는 철학공부의 기본정신이라고 일찌기 배웠던 바이고 심지어 가르쳐 왔으련만 생활의 타성에서 무디어진 생각이 새삼스러이 돌이켜 되살아났던 것이다. 이같은 반성이 먼 이역에서의 체험중에 비롯했다는점에서 우리네 옛 유학자들이 이른바 덕성지지만을 강조하고 문견지지(견문으로 익힌 지식)는 한갓 완물상지(玩物喪志, 뜻을 저버리기 쉬움)하는 것이라 소흘했던 경향이 내 경우로서는 반드시 옮지만은 않다는 생각에 미치기도 했다.
온갖 곳의 인종이 모여사는 미국이다보니 대체로 단일민족이자 동질적인 문화배경을 갖는 우리 사회와 여러면에서 서로 다른 생활상의 비교감각이 더욱 예민해질법하다.
회사의 사장이나 대학교수가 적어도 중년 나이쯤 되어야한다는 법이 없다. 능력이 있고보면 20여세에 이미 사장이나 교수로 발탁되는 예도 흔하기 때문이다. 대학교수나 회사직원이 양복입고 「넥타이」를 매야한다는 법도 없거니와 여학생이나 숙녀라고 「원피스」나 치마를 입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도대체 어느 누구도 그것이 품위를 손상시킨다는 생각도 하지 않으니 그러지말라는 법이 또한 없다. 부모의 언행은 그의 자녀들이 모방하기 십상이거니와 부모가 하지말라고 금하면 한결갈이 왜 안되느냐고 반문한다. 부모들은 흔히 아이들에게 어른의 헹동을 배우지 말고 어른의 말씀을 배워라하고 권위적이기 쉽다. 그러나 납득할만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고서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것이 애들의 성미인 것같다.
이러한 관찰을 거치는 중에 우리는 스스로의 주변생활을 돌이켜 보게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수도꼭지의 모양이 거의 비슷하듯이 우리의 의식과 생활양식은 거의 획일적이라고 표현해서 지나친 것일까. 전통적인 인습과 기존생활규범을 아직도 생활 밑바닥에 상당히 깔고있는 우리는 의식과 행위의 세계에서 통제되어 있다고 느끼지는 않는가. 남의 인격과 개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실천하면서도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존중하고 살려나아가려는 의식과 노력은 미약하지 않은가.
그런법은 있어도 이런법은 없다는 식의 사고방법은 생활의 다양화와 창의성을 저해하기 쉽지 않은가.
인습의 미덕을 간과하지는 않는다. 예로부더 여과되어온 전통적인 슬기로서의 인습은 눈앞의 유행에 부화뇌동하지 않는 개성을 지니며 때에 따라서는 유행을 선도하는 모범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개선의 여지가 있는 요소까지도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다.
생활에의 창의력과 폭넓은 다양화도 끊임없이 요구될줄 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딸보다 아들 낳기를 기대하는 감정이나, 부모 형제와 함께 사는 가정을 무조건 대가족이라 하면서 이를 구습의 유교식이니 전근대적 사고방식이라고 규정하기 일수다.
그때마다 유교의 어떤 이론이나 문헌에 근거하는 발언이냐고 재우쳐 묻곤하지만, 학문과 사상에서 벗어나고 곡해된 생활의 단면을 전체화하는 것도 근거희박한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한다.
맹자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이른바 남녀칠세부동석이란 규범의식이 압도하던 시대에 살았으면서도 그렇다고 물에빠져 허덕이는 여인을 그냥 내버려두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짐승이나 다름없다고 갈파한바 있다. 기성관념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인간본위의 생활지침을 예시하는 븐보기가 아닐 수 없다.
오늘 날 우리 생활의 저변에서도 남녀관계는 아직도 부자유스럽고 불평등한 고정관념의 찌꺼기가 청산되지 못하고 있다고 든다면 과장된 것일까. 기성관념에 편승하려는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개성을 계발할 수 있는 슬기와 생활중에서 창의성과 다양성을 마련하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한편 전통적 미덕이 무엇인가를 헤아릴 수 있는 분별력과 그 실천이 또한 소망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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