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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규연의 시시각각

KBS, 히딩크 어떨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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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규연
이규연 기자 중앙일보 탐사기획국장
이규연
논설위원

그리스·미국·보스니아·스위스·온두라스·에콰도르·이란·일본·칠레·카메룬·코스타리카·코트디부아르·콜롬비아.

 이들 나라의 공통분모는 축구대표팀 감독이 외국인이라는 점이다. 월드컵 본선진출국 32개국 중 14개국이 그렇다. 그중에서 코스타리카는 가장 주목받는 팀이다. 중남미의 소국이 우루과이·이탈리아·그리스를 차례로 격파하고 사상 최초로 8강에 진출했다. 돌풍의 중심에 콜롬비아 출신의 핀투 감독이 있다. 한 언론은 그를 이렇게 평했다.

 ‘그에게서 히딩크의 냄새가 난다.’

 히딩크는 아시아축구를 ‘월드컵 4강’에 올려놓았다. 축구계는 이를 ‘히딩크 효과’라고 칭했다. 한국 축구는 히딩크 전과 후로 나뉜다. 히딩크는 투지에 의해 작동되던 축구판을 확 바꾸었다. 의리 대신에 실력으로 선수를 기용했다. 기술·체력을 바탕으로 한 압박축구를 이식했다. 선수관리·홍보·대중관리까지 고려한 운영시스템을 세웠다. 최근 홍명보호가 초라한 성적표을 갖고 귀국하면서 히딩크의 추억이 고개를 들고 있다.

 축구팀보다 더 히딩크 효과가 필요한 곳은 KBS가 아닌가 싶다. 우리의 대표 공영방송은 갖가지 만성병에 시달려왔다. 정치적 독립성과 공공성, 경영합리화를 둘러싼 시비가 그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KBS의 독립성·공공성을 확보한다는 취지로 독립규제기관(방송위원회)과 감독기관(이사회)을 설치하는 통합방송법을 통과시켰다. ‘2000년 체제’는 지금까지 이어온다. 세계의 공영방송 거버넌스 유형은 세 가지로 나뉜다. 정부·의회 모델(프랑스·미국), 독립감독기구 모델(영국·일본), 시민 모델(독일)이다. 김대중 정부는 감독기구를 두면서도 정부가 그 구성·운영에 관여하는 독립기구적 정부모델을 택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KBS의 행로는 순탄치 않았다. 매번 새 정부는 공영방송을 반석에 올려놓겠다고 약속했다. 신임 사장도 ‘국민의 방송’으로 거듭나겠다고 외쳤다. 2004년 한나라당의 국가기간방송법 요구, 2012년 시민단체의 공영방송 지배구조 일원화 건의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요구는 허공으로 날아간 뻐꾸기에 불과했다.

 최근 KBS는 세월호 참사 과정에서 재난 주관방송사로서 제구실을 못했다. 청와대 압력설에 휘말려 사장·보도국장이 물러났다. 문창극 총리후보자 보도로 이념논쟁의 한복판에 섰다. 일부 정치권과 학계는 시민모델적 요소를 가미하라고 요구한다. 각계의 질타와 요구에 땜질 대응만 하다가는 한 치 앞도 전진할 수 없다. 이제 ‘2000년 체제’를 재검토할 때가 됐다. 새 판을 짜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이념·사업자 간 극한 갈등을 넘어서야 한다. 그렇더라도 산적한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고 민영과 확연히 구별되는 공영질서를 세우기 위해 새 판은 필수적이다. 이와 함께 새로운 리더십도 등장해야 한다.

 KBS 사장의 선임 작업이 진행 중이다. 대상자는 거의 모두 KBS나 방송기구 출신이다. 각자가 아무리 유능해도 내부인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청와대·정부·국회·노조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가 강하게 형성돼 있다. 한번쯤 공영방송 CEO에 외국의 방송경영인을 영입하면 어떨까.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 사자처럼 눈 딱 감고 의리·정치를 떠나 성과·실력대로 조직을 운용하고 선진 글로벌전략을 구사할 줄 하는 외부인에게 공영방송의 설계를 맡겨 보는 것이다.

 공영방송의 책무인 ‘국가정체성 수호’ 사명을 수행하는 데 부적절하고 국내 방송 사정에 어둡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방송대표는 국적자로 한한다’는 법적 한계(방송법 13조3항)도 있다. 하지만 월드컵 개최를 코앞에 두고 히딩크를 기용할 수밖에 없었던 축구계처럼 공영방송의 고질적인 만성병을 고치려면 외부 해결사의 영입은 검토할 만한 대안이다. 당장 법적 대표가 어렵다면 편성을 제외한 경영 총괄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히딩크 효과’는 축구계보다 공영방송계에 더 필요하다.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