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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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슬기」. 참도 좋은 말이다. 사전에 보면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능력. 지·지혜…」라고 풀이되어 있다.
기름값이 뛰고 전기값이 뛰고 덩달아 모든 물가가 들먹이고 있는데 대해 한 경제각료는 어려운 고비를 생활의 슬기로 이겨나가자고 타이르신다.
어른다운 말씀이시다. 어느 경제평론가도 힘을 내어 슬기롭게 살자고 충고한다. 이 또한 고마운 말이다.
슬기만 있으면 된다는 얘기들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분들이 말하는 슬기란 별 게 아니다.
그저 먹을 걸 덜 먹고, 입을 걸 덜 입고, 쓸 걸 좀 덜 쓰는 게 바로 슬기라는 뜻인가 보다.
평균 20만원 월수의 근로자들은 한결같이 2만원만 더 있으면 살 것 같다고 아쉬워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것이 앉은자리에서 30%이상의 감봉처분을 받은 셈이다. 그러니 적어도 6만원은 줄여 써야 할 판이다.
30평 짜리「아파트」인 경우 연료비만도 겨울엔 2만1천4백원이 더 들게 됐다. 옷값도 천값 만 18%이상이 올랐으니까 2만 원 짜리 옷이라면 적어도 2만6천 원쯤으로 오를게 틀림없다.
기름값과는 관계없을듯한데 쌀값도 15일부터 가마당 3만4천 원으로 오른다. 병원값도 기습적으로 최고 66%나 올랐다.
하기야 6.25의 그 끔직한 속에서도 우리는 용케 굶주린 배틀 움켜쥐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건 슬기 덕이 아니다. 그저 생존의 본능 탓이었다.
하나 못 살겠다고 해서 아우성치는 것은 아니다. 기왕에 서민들에게 『슬기』를 말한다면 말하는 쪽에도 다스리는 사람다운『슬기』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달아 밝히고 시비와 선악을 정확하게 가려내는 능력I』 이것이 슬기의 또 다른 풀이다.
불과 몇 해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모든 「보일러」를 기름으로 대체하라고 강요했던 정책구호는 너무나도 슬기롭지 못한 일이었다.
유가를 59%나 인상한 게 서민들의 가계를 얼마나 결딴내는지를 미리 계산하고, 여기 적절한 보완책을 함께 제시하지 못한 것은 더욱 슬기롭지 못한 일이다.
이번의 대담무쌍한(?) 유가인상으로「우리경제의 장기안정기반이 구축」된다고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올해 안에는 또다시 원유값을 올리지 않겠다는 당국자의 말을 믿을 사람은 또 몇이나 되고….
교통요금을 안올리겠다는 말을 믿을 사람은 특히나 없다. 이게 사실은 속아만 살아온 서민들이 몸으로 터득한 『슬기』다.
그러나 뭣보다도 우리네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게 하나있다. 『나라가 흥할 때가 돈을 모을「찬스」지만, 어려워질 때는 더 좋은「찬스」다』 라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에서 「버틀리」선장이 말했다.
어려움은 다같이 겪어야 그래도 견딜 맛이 있다. 남의 어려움을 틈타서 더한층 돈을 모으려는 무리가 있다면 그것이 가장 큰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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