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진우의 저구마을 편지] 친구네 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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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친구가 고추씨를 뿌려달라며 잡초 무성한 밭을 부탁하고 갔습니다. 그 밭을 갈아엎느라 한참을 쇠스랑질 하다 문득, 이 밭이 생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땀을 흘렸을까,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비가 조금만 많이 내려도 자갈이 드러나는 다른 밭과는 달리 살이 참 깊고 부드러운 밭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밭인 땅은 없을 겁니다. 요즘처럼 기계 대어 하루아침에 밭을 만들 수도 없었겠지요. 수십 년,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을 제가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이 밭에서 청춘을 보내고 생애를 마감했을 겁니다.

건너 밭에서 꼬부랑 할머니가 점심도 거른 채 뭉툭한 호미로 김을 매고 있습니다. 며칠째 그 모습입니다. 잔뜩 굽은 등과 가는 팔로 일궈온 거친 밭. 기계가 아니라 마음으로 밭과 하나 되어 돌보는 저 밭도 언젠가는 지금 제가 서 있는 밭처럼 되겠지요. 제 몸처럼 땅을 여기고 산 사람들이 날 저물도록 호미질하고 있는 들에서 턱없이 좋은 것만 바라며 조급하게 살아온 이 사람, 참 부끄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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