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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그 전 대사 회고록 한국 관련 부분 발췌 요약 … 이후락의 김일성에 대한 평가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1982년 5월, 뉴질랜드 웰링턴을 방문한 조지 H W 부시 부통령 일행. 당시 그레그는 백악관 NSC(국가안보회의) 보좌관 자격으로 부시를 처음 수행했다. 사진 왼쪽부터 피트 틸리 공보비서, 부시 부통령, 낸시 다이크 부통령 외교안보보좌관, 댄 머피 비서실장, 크리스토퍼 버클리 연설문 담당, 킴 브래디 부시 여사 수행비서. 그레그 보좌관. 부시 여사. 두 달 뒤 그레그는 부시 부통령의 외교안보보좌관이 된다.

월간중앙 ‘팟 셔드(Pot Shards)’는 깨진 항아리 조각을 의미한다. 6월 워싱턴의 뉴아카데미아 출판사에서 출간될 그레그 대사 회고록의 제목이다. 그는 최근 2년간 회고록 집필에 몰두했다. 초고를 완성하고 CIA의 검열도 통과했다. 지난 4월 5일, 뉴욕 맨해튼에서 북쪽으로 약 60㎞ 떨어진 전원마을 아몽크에 있는 자택을 찾아갔을 때 그는 회고록의 마지막 교정쇄를 보고 있었다.

“주한미대사로 있을 때 서울 시내 건설 현장을 지나칠 일이 있으면 차에서 내려 종종 둘러보곤 했어요. 땅을 파다 보면 깨진 도자기 조각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거든요. 그때 추억을 떠올리고 붙인 제목입니다.” 그의 회고록에는 ‘CIA, 백악관, 그리고 두 개의 코리아에서 보낸 삶의 편린들(Fragments of a Life Lived in CIA, the White House and the Two Koreas)’이란 부제가 달려 있다.

그레그 대사는 그동안 언론과의 인터뷰, 강연, 기고 등을 통해 한국과 관련한 개인적 경험을 부분적으로 털어놓은 바 있다. 지난 4월초 김대중도서관이 출간한 영문 자료집()에는 CIA 한국지부장과 주한미대사 시절을 회고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곧 출간될 그레그 대사 회고록에 실릴 한국 관련 부분을 발췌해 요약·정리한다. 그레그 대사는 개인 앨범에 담긴 추억의 사진들을 월간중앙을 위해 기꺼이 제공했다.

1981년 6월,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이 맬콤 프레이저 호주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위해 콜로라도주 덴버로 이동하던 중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원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리처드 앨런 국가안보보좌관, 레이건 대통령, 크레이그 풀러 비서관, 존 홀드릿지 국무부 관리, 그레그 NSC 보좌관, 딕 다먼 예산관리국 직원.

1 CIA 한국지부장 시절

이후락과의 첫 만남

1973년 중반, CIA 한국지부장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한국 중앙정보부(이하 중정) 최고 책임자인 이후락을 만난 것이다. CIA는 대북정보 수집에 애를 먹고 있었다. 중정과 긴밀히 협력해 CIA의 대북정보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은 내가 맡은 주요 임무 중 하나였다.

이 부장은 주한미대사관 건물 맞은 편에 있는 큰 빌딩의 꼭대기 층 전체를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그는 말쑥한 정장 차림의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큰 책상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마디 한담을 주고받고 나서 나는 김일성을 만나본 소감을 물었다. 이후락은 1년 전 비밀리에 방북해 김일성을 만났다. 그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그는 엉터리 영어로 “‘진짜 사내(quite a guy)’야. 일인 통치. 아주 강력해. 진짜 사내!”라고 말했다.

중정의 도움으로 CIA의 대북정보력을 향상시키려던 계획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중정에 한두 명의 뛰어난 정보 분석관이 있긴 했지만 중정의 주된 관심사는 대북정보 수집보다 국내정치 공작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중정의 눈에 김대중은 눈엣가시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김대중은 일본을 돌아다니며 유신체제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고 있었다.

김대중 납치사건

그해 8월초, 용산 미군 장교클럽 리셉션에 참석하고 있는데 필립 하비브 주한미대사로부터 급히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그는 몹시 격앙돼 있었다. 하비브 대사는 “김대중이 도쿄의 한 호텔에서 납치됐는데 아무도 그의 행방을 모른다”며 “배후에 중정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대로 두면 중정이 그를 죽일 수도 있다”면서 “내일 아침까지 누가 납치했고, 그가 어디 있는지 파악해 알려달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김대중 납치는 중정 요원들의 소행이며, 그는 지금 대한해협을 항해 중인 소형 선박에 납치돼 있다”고 보고했다. 나는 그 정보를 갖고 하비브가 뭘 하려는지 묻지 않았다. 청와대로 달려가 김대중을 당장 풀어주라고 요구할 걸로 짐작했을 뿐이다. 하지만 하비브는 그 이상으로 영리했다.

미국 대사가 한국 대통령 면전에서 따지듯 대들면 박정희의 자존심 때문에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청와대로 직행하는 대신 박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김대중이 납치된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가 살해되면 한미관계에 심각한 파장이 일 수 있으니 그를 살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접근 방식은 한국 정부 내 불순 세력이 제멋대로 저지른 짓이라는 시나리오를 통해 자신의 체면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박정희에게 제공했다. 그렇게 해서 김대중은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최종길 교수 사망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소식이 알려지자 한국의 대학가가 시끄러워졌다. 특히 서울대 시위가 심했다. 중정은 학내 소요사태의 배후 중 하나로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서울법대 교수 한 명(최종길 교수)을 붙잡아 조사했다. 신문을 받던 도중 그는 조사실 창문에서 뛰어내려 사망했다. 고문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택한 것인지, 고문 끝에 숨진 것을 중정이 실족사로 위장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아무튼 엄청난 가혹행위가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나는 즉각 보고서를 작성해 CIA 본부로 보내면서 내가 한국정부에 항의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내 상관은 “한국인을 한국인들로부터 구하려 들지 말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나는 31년 간의 내 CIA 경력 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상관의 지시를 거역하기로 마음먹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을 찾아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무고한 시민을 고문하는 조직과는 같이 일하기 힘들다”는 뜻을 전달했다. 박 실장은 메모를 하며 진지하게 내 얘기를 듣더니 “찾아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레그가 부시 부통령(왼쪽)의 외교안보보좌관으로 활약하던 1983년, 백악관 내 부통령 집무실에서 찍은 사진. 텍사스에 있는 부시 대통령 기념도서관에 지금도 걸려 있다.

2 주한미대사 시절

부시 대통령의 전폭적 후원

1989년 9월 주한미대사로 서울에 부임해 1993년 2월까지 대사로 근무했다. 당시 한국 대통령은 노태우였다. 한국인들 사이에는 과소평가돼 있지만 그는 매우 유능한 지도자였다. 그가 추진한 ‘북방정책’을 조지 H. W. 부시 행정부는 적극 지지했다. 나는 부시가 부통령으로 있던 6년 반 동안 그의 외교안보보좌관으로 일했다. 그 덕분에 대사로 있으면서 나는 백악관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한국은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한국 문제에 관한 한 내가 주도권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나는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었던 김종휘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며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었다.

전술핵 철수

내가 제기한 첫 번째 문제는 주한 미공군 기지에 배치된 전술핵 철수 문제였다. 매년 미국에서 검열팀이 와서 전술핵의 안전관리 실태를 점검하고 돌아갔는데 나는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한국에 배치된 전술핵의 문제점과 위험성을 알게 됐다.

더구나 당시 북한은 은밀히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었다. 따라서 남한에서 전술핵을 철수하면 핵개발을 중단하라고 북한을 압박하고 설득하기가 훨씬 유리해질 거라고 판단했다. 우리가 북한 핵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면 주한미군의 전술핵이 한국 대학생들 사이에 쟁점으로 떠오를 거라는 판단도 했다.

나는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루 메네트리와 조심스러운 협의를 거쳐 청와대에 이 문제를 제기했다. 청와대의 모든 관계자들은 지적으로 열린 자세로 내 얘기를 경청했다. 구체적 협의과정을 거쳐 대사로 부임한지 약 1년 만에 나는 한국 대통령과 주한미군사령관이 전술핵 철수에 찬성한다는 메시지를 워싱턴에 보낼 수 있었다. 그로부터 1년 후 부시 대통령은 미본토 이외의 지역에 배치된 모든 전술핵을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1992년 서울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골프 라운딩 도중 찍은 기념 사진. 왼쪽부터 이상옥 외무장관, 노 대통령, 그레그 주한미대사, 현홍주 주미한국대사.

북방정책

부시는 노태우가 추진한 북방정책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1990년 노태우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을 주선한 것도 부시였다. 이듬해 한국은 소련과 역사적 수교를 했다. 부시는 자신의 중국 내 영향력을 활용해 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는 걸 도왔다.

중국이 오랫동안 유지해온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에 대한 반대 입장도 철회시켰다. 당시는 한미동맹이 그 어느 때보다 원활하게 작동하던 시기였다. 서울은 부시의 강력한 외교적 지지에 감사를 표했다. 활발한 대화를 통해 남북관계가 진전되는 것을 나는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다.

광주 방문

그러나 계속해서 한·미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문제 중 하나가 광주사태였다. 광주 미문화원이 시위대의 화염병 공격에 시달리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나는 광주를 직접 방문하기로 마음먹고, 1990년 1월 광주에 내려갔다. 도착하자마자 현지인들은 광주사태와 관련한 미국의 책임에 대해 사과하러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미국이 사과할 일은 없다”고 말했다. 다만 광주 시민들이 미국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이유를 좀 더 명확히 알기를 원한다고 대답했다.

나는 현지 주민들을 만날 때마다 미국은 광주사태의 공범이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아무도 믿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광주사태가 발생한 지 10년이 지났음에도 현지 주민들 사이에 사라지지 않고 있는 분노와 비애를 확인했다. 광주에 도착한지 사흘째 되던 날 나는 사과하러 왔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바꾸기로 했다. “그렇다. 이 비극에 대해 미국이 너무 오랫동안 침묵을 지킨 데 대해 사과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나와의 면담을 거부했던 반미 시위 주동자들도 태도를 바꿨다. 나는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6명의 시위대 대표들과 만났다. 그들이 나에게 한 첫 번째 질문은 광주 시민들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게 누구냐는 것이었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오로지 한국인들만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거짓말이라며 “우리는 미국이 위성으로 한국을 손바닥처럼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반박했다. 나는 “미국이 강력한 위성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의 마음까지 읽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그들의 계속되는 질문을 통해 나는 56년 헝가리사태 당시 현지인들이 기대를 걸었던 미국이 자신들을 구해주지 않은 데 대해 품었던 배신감과 비슷한 감정을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느꼈다.

세 시간이 넘는 대화가 끝나갈 무렵, 일행 중 한 명이 질문했다. “미국이 전두환과 가깝지 않았다면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 워싱턴에서 정상회담을 한 첫 번째 외국 지도자가 전두환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맞다. 전두환은 레이건의 첫 번째 손님이었고, 그 대가는 김대중의 목숨이었다”고 대답했다. 레이건 당선인팀은 밀고 당기는 물밑 협상 끝에 사형을 선고받은 김대중을 특별사면해 석방하는 조건으로 전두환의 워싱턴 방문을 수락했다. 그 사실은 워싱턴에선 상식처럼 돼 있었지만 광주 시민들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나의 첫 번째 광주 방문은 그들이 가진 ‘한(恨)’이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나는 2002년 처음 평양에 갔을 때도 똑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광주에서 배운 교훈은 북한 사람들과 일정한 신뢰를 쌓고 대화를 이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팀스피릿 훈련 중단

북방정책에 힘입어 남북관계가 진전을 보이는 데 대해 미국과 한국의 군부는 복합적인 반응을 보였다. 매년 봄 북한의 도발을 상정하고 한·미는 연합방어훈련인 팀스피릿 훈련을 실시했다. 그 때마다 북한은 최고 수준의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미국의 ‘호전광’과 남한의 ‘괴뢰정부’를 비난하는 선전전에 열을 올렸다. 나는 로버트 리스카시 주한미군사령관과 긴 협상 끝에 팀스피릿 훈련 중단에 관한 한·미 양국 국방 당국의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1991년말 이 사실이 공표되고 나서 남북한은 바로 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이어 노태우는 남한에는 미국의 전술핵이 없다고 선언했다. 곧이어 남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도 서명했다. 이어 8차례의 남북 총리급 회담이 열리는 등 남북간 화해와 협력은 중대한 진전을 보였다.

불행히도 이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92년 가을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팀스피릿 훈련 재개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딕 체니 국방장관은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었다. 내게 의견을 구했다면 물론 나는 강하게 반대했을 것이다. 내가 주한미대사로 재임하는 동안 미국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였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1993년 팀스피릿 훈련이 재개되면서 남북관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북한은 그해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굿바이 서울

1993년 2월 서울을 떠나며 김종휘 수석과 작별 만남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그는 “현재의 서울과 워싱턴 팀을 그대로 갖고 우리가 딱 1년만 더 같이 일할 수 있다면 북한 문제는 완전히 다 해결될 것”이라며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빌 클린턴과 김영삼으로 한·미 양국 정권이 넘어가면서 1994년 북핵위기는 이미 예고돼 있었다.

내가 대사로 재임하던 동안 한·미관계는 두 명의 뛰어난 대통령의 리더십에 힘입어 크게 발전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남북관계도 꽃을 피웠다. 누가 묻더라도 주한 미대사 자리는 미 정부의 모든 공직을 통틀어 가장 도전적이고 보람 있는 자리 중 하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배명복 중앙일보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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