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의 권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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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영국에서 책을 산다는 것은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1년에 대략 3만6천 종의 새로운 출판물이 발간되기 때문에 서점은 도서관만큼 크고 복잡하다. 책은 분야별로 구분되어 전시되는데 한 분야가 방 하나 또는 층 하나를 모두 차지한다.
그래서 예컨대 『난중일기』 같은 책이 영국에서 발간된다면 군사학·역사학·문학 중 어느 분야에 구분되어 있는지 어리둥절해서 서점을 여러 번 오르락내리락 해야된다.
몇 달 전 새로 출간된 시집을 찾다가 「유머」로 분류된 구역에서 찾아낸 적이 있다.
작품이 「유머」시가 아니고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신인의 진지한 작품이기 때문에 점원이 실수했겠지 경도로 지나쳐버렸다.
그런데 최근에 영국의 상류계급과 비 상류계급층의 언어 습관에 관한 책을 찾다가 또「유머」구역에 분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알아본즉 아직 일반적인 평가가 나지 않은 작가의 문학작품, 또 저자의 학술적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전문분야서적 등 쉽게 말해서 사이비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는 책들은 「유머」구역에 전시한다는 것이다.
책을 쓴 사람이야 자기의 역작이 「유머」 거리정도로 취급되는 게 불쾌하겠지만 서점에서 일단 그렇게 구분되면 어느 쪽에서도 이의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걸 보면서 얼마 전 한국에서 있었던 문학논쟁이 영국에서라면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문가들이 하나의 소질을 놓고 그게 문학작품이냐 아니냐를 시비하기 전에 이미 서점에서 그것을 「문학」으로 또는 「유머」로 구분해버리니까 일차적인 분류는 출판즉시 실수요자에 의해 완료되는 것이다.
책으로만 내면 어떤 작문이라도 쓴 사람의 고집 하나로 문학이니 비 문학이니로 행세하는 한국의 경우와는 대조적이다. <장두성 런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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