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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택 기자의 '불효일기' <30화>시한부, 끝이 아니다 -2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통증은 정말 견디기 힘들다. 모든 질병의 핵심이 통증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 역시 아버지만큼은 아니었지만 최근 입원에서 통증이라는 것을 제대로(?) 느껴봤다. 혹시나 심장 쇼크가 올까 싶어 걱정을 했고, 죽을 걱정에 새벽 내내 응급실 의자에 앉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심장이 조여오는 느낌이 들면 의사에게 목숨을 구걸해 보려고, 나 좀 살려달라고 소리쳐야 했기 때문에. 늙으신 부모님과 아내를 두고 죽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지만.

통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아버지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올해 1~3월이었던 것 같다. 그 때만 해도 아버지에게 암은 단지 몸이 쇠약해지는 것으로만 다가왔고, 통증으로 고통받는 것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쇠약해진 아버지와 농담 따먹기나 하고, 또 아버지와 맛있는 것을 먹으면 된다는 생각 정도만 했었다. 그것이 아버지의 좋은 소일거리였으니. 물론 나 자신의 경제적 문제는 잘 해결해 나간다는 가정 하에서다.

하지만 4월부터는 아버지의 상태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때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에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결혼 날짜, 올해 10월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중간에 잡았던 6월이었더라면, 지금이 6월인데 아버지 거동이 상당히 불편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혼식을 버텨내셨을지도 의문이다. 올해 10월은갷. 아득하다.

아버지의 마음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작 63세. 할아버지는 83세까지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는 할아버지보다 20년을 덜 살아야 한다니 얼마나 억울할 것인가. 그것도 그 때보다 10년이 지난 이 시점에 말이다. 10년이면 의술이 발전해도 한참 달라진 시대인데.

뭐 딱히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없는 불효자의 마음이지만, 이런 인간적인 한계의 벽을 볼 때면 그저 눈물이 난다.

아버지와의 병원 나들이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났다. 지난번 항암치료 이후 1주일만이다. 매주 하루씩 항암치료를 받는 스케줄이다.

내게는 정말 기나긴 1주일이었다. 아버지의 항암치료 후, 본가에서 만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한 그날 갑자기 가슴에 통증이 와 3일간 입원을 하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느껴봤다. 다시 퇴원을 했다. 그리고는 또 아버지의 항암치료. 아득하다. 자칫 일이 잘못 되었더라면, 항암치료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일상으로 돌아왔다. 회사 행사로 금천구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 강의를 다녀온 뒤,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어머니 없이 혼자 왔다. 택시를 타면 어머니와 함께 오나, 혼자 오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택시는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치다. 아파서 버스를 탈 여력이 없을 때 택시를 탄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속은 다른 곳에 있었다. 최근 어머니가 "몸만 힘들고 효과도 없는 것 같은데 항암치료를 그만하는 것이 어떠하냐"고 물어본 것이 화근이었다. 아버지의 입장은 "약간, 아니 쬐금만 효과가 있어도 약을 맞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몸도 성치 않은 아버지가 먼 길을 통원치료하는 것도 안쓰럽고, 이제 대부분의 약을 써봤는데 치료보다는 식사와 통증관리에 주력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교수의 소견에 따르면 어머니의 말씀이 맞겠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는 이상 그렇게 이야기하기도 어렵다.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아버지가 하고 싶은 만큼 약을 맞도록 놔둡시다"라고 말했다. 비록 그 약이 항암제가 아니라 비타민이더라도, 아버지는 정신적 힐링과 치유를 느낄 것이다. 자식인 내게는 그 정도면 될 것이다. 물론 항암제를 맞긴 하니 약간의 효과는 있지 않을까 기대는 해본다.

내가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외래 진찰을 마친 뒤였다. 교수에게 통사정을 했다고 한다. "교수님, 제가 항암제를 쓰지 않더라도 매주 1회씩 교수님 진찰을 보게 해 주십시오. 진통도 상담해야 하고, 교수님 얼굴 좀 봐야 덜 아픈 것 같습니다"라고 했더니 웃으며 그러시라고 했단다. 다행히 교수가 적어준 소견서에도 "환자가 적극적 치료를 원하고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적어도, 아버지에게 통증 없이 살다가 죽을 가능성을 막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아버지에게는, 적어도 남은 기대여명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당장 몇 주 뒤에 다가올 수도 있는 치료 중단 또는 극도의 통증이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치료 중단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아버지도 알고 있다. 교수가 보여줬던 사진 속 아버지의 늑골과 늑막은 갑자기 커지면서 폐를 자극하는 모습이 선명했고, 언젠가는 아버지에게 통증으로 다가올 것이다.

아버지를 모시고 4층 외래항암약물치료실로 갔다.

'시한부'에 대한 두 번째 대화

하지만 당장 항암제를 맞을 수는 없었다. 항암제를 맞아야 하는데 혈압이 너무 낮게(수축기 90mmHg 수준은 되어야 항암제를 맞을 수 있다)나와서 간호사에게 "좀 쉬고 다시 오시라"는 판정을 받았다. 혈압이 조금은 더 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낙담하는 아버지에게 "그냥 점심이나 드시죠"라면서 모시고 갔다. 혈압은 혈압이지만, 점심은 드셔야 하는 것 아닌가. 병원 내 식당에 갔다. 이전에 내가 대구탕을 포장해 왔던 곳인데, 수익이 적어서 그런건지 대구탕 메뉴를 아예 없애버렸다. 씁쓸했다. 코스 요리는 여전히 잘 있었다.

아버지는 잡탕밥, 나는 돌솥비빔밥을 시켰다. 아버지가 수녀님 고모께 용돈을 받았다면서 자신이 사겠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용돈이 생길 때마다 내게 무언가를 사주려고 하신다. 매번, 이번이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해주는 것이라는 마음가짐이 느껴진다.

밥이 나왔을 때쯤, 아버지에게 기대 여명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다시 밝아졌고, 적어도 막연한 두려움보다는 목표를 세우고 적어도 1개월이라도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아버지와 내가 합심해 아버지의 수명을 늘리는 것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말을 했다.

"아버지, 교수님이 아버지는 올해를 못 넘길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회사에서 박성우 선배 이야기를 들어보니, 식사 잘 하고 잘 모시면 1년씩 더 사는 어르신도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잘 알겠다면서, 아프지나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일 죽더라도 최선을 다해 아버지의 몸 관리를 함께 하자는 말을 하면서 식사를 마쳤다. 아버지는 물론 지금은 통증이 또 가라앉아 기분이 좋다는 말도 하셨다.

사실 아버지도 어느 정도는 알고 계셨던 사실이긴 하다. 지난주 아버지가 호스피스 때문에 방문했던 병원에서 입원 자격을 '기대여명 3~6개월로 의식이 있는 말기 암환자'라고 명시해 뒀던 안내자료를 보셨으니 말이다.

물론 기대여명 6개월은 보수적인 판단일 것이라고 나는 믿어본다. 밥을 먹고 나서 간신히 혈압이 좀 올라가 항암제를 맞을 수 있었다. 항암제를 다 맞은 아버지는 별 탈 없이 귀가했다. 전화에는 "야, 너 볼 땐 안 아프더니, 집에 오니깐 아프구나"라고 하셨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6개월 남짓한 시간은 하루 이틀씩 줄어만 간다. 물론 건강하고 젊은 우리 모두에게도 기대여명은 유한하겠지만, 남아있는 시간 대비 하루의 비율은 아버지에게 더 클 것이다. 아들인 나도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이 하루씩 줄어든다는 생각에 시간이 이렇게 아까운데, 본인이 느끼는 감정은 어떠할까.

아직까지 아버지가 미리 남겨둔 유언은 없다. 하지만 늘 말씀으로 하시는 이야기가 있다. 그게 유언 아닌가 싶다. 내게는 운동과 자기계발, 내 아내에게는 많이 먹고 영어 공부를 하라, 어머니에게는 술을 줄이고 아프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라 등이다.

내일 아침은 일찍 나와 걸어서 출근해야 겠다.

*ps. 아버지는 "며느리를 데리고 조상들 묘소에 가서 이 봉분에 계신 분은 어떤 분이고, 저 분은 어떤 어른인이 설명해 주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ps2. 아버지는 신부님과 통화를 하셨다. 내가 전화 한 번 걸어보시라고 했다. 신부님의 격려를 듣고 나니 아버지는 꽤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다. "옛날에는 무서운 형이었어"라는 말과 함께.

이현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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