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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서현 기자의 아부다비 겉핥기 (1) 국적이 스펙인 나라…경계에 선 사람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전통춤을 추고 있는 이마라티 소녀들. 무슬림 여성들은 월경을 시작하면 가족 외 남성 앞에서는 히잡으로 머리카락을 가려야 한다. 아직 머리를 내놓아도 되는 어린 소녀들의 춤은 긴 머리카락을 찰랑대며 흔드는 동작으로 구성된다.

"위험하지 않아? 갓난아기 데리고 어딜!"

[심서현 기자의 '아부다비 겉핥기'] (1)

6개월 된 아들을 데리고 아랍에미리트(UAE)에 반년 간 살러 간다고 했을 때 주변인들의 반응이 이랬다. 북한을 머리에 이고 사는 우리야말로 남들 보기엔 스릴 넘쳐 보인다는 걸 알랑가 모르겠다. 하긴, 대다수의 한국인에게 아랍이라고 하면 아랍의 봄, 오사마 빈 라덴, 알카에다 같은 단어들이 먼저 떠올랐을 터다. 하지만 UAE는 다들 한국보다 1인당 GDP가 높은 걸프협력회의(GCC) 6개국-사우디아라비아ㆍ쿠웨이트ㆍUAEㆍ카타르ㆍ오만ㆍ바레인- 중에서도 정치적,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된 나라다.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을 든 무슬림 전사 같은 건 없지만 한 손에는 10kg 아들, 한 손에는 기저귀 가방을 들고 고군분투하는 한국 아줌마는 여기 있다. UAE의 수도 아부다비에서 애 키우며 신문 읽으며 곁눈질한 이 나라 이야기를 풀어놓으려 한다.

"얘도 이마라티(UAE인을 가리키는 아랍어)지. 근데 있잖아, 얘 엄마는 오마니(오만인)야~"

돌이 갓 지난, 예쁜 아랍 여자 아기의 기저귀를 갈다가 동네 어린이집의 필리핀 보모는 내게 속삭였다. 그가 왜 슬쩍 눈짓을 하며, 목소리를 낮추며 이 이야길 하는지, 나는 이곳 아부다비에서 두 달을 더 산 이후에야 알게 됐다.

"땅 파봐라, 10원이라도 나오나." 돈 아까운 줄 모른다며 타박할 때 어른들은 종종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땅 파면 돈 나오는 나라에 살고 있다. 손에 흙 묻힐 필요도 없다. 나라에서 외국 자본과 기술ㆍ노동력 끌어다가 석유 콸콸 퍼 올려서 얻은 부를 국민에게 나눠준다.

국가의 은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비롭다. 자녀 1명당 매월 600디르함(한화 18만 원)이 지급된다. '애개?' 라고 생각했다면 끝까지 들어보길. 지급 기한은 그 자녀가 취업할 때까지다. 월 300디르함이던 것이 2006년에 2배가 됐는데, 물가가 올라서 이걸로 안 된다며 1000디르함(한화 30만 원)으로 인상하는 방안이 의회에서 논의중이다.

이마라티의 전통 거실을 재현한 모습. 커피와 디저트, 손님 접대와 수다는 지금도 이들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전통 스포츠인 매사냥 역시 일부 부유층을 중심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한국인의 일생과업이라는 내집마련도 이곳에선 나라님의 일이다. 땅 없는 이에게는 집터를, 집 없는 이에게는 건축비를 대준다. 지난주에도 정부가 296명의 국민에게 540억 원의 주거비 지원을 해줬다. 이중 202건은 무이자 대출, 94건은 무상 제공이었다. 이런 내용은 신문에 1단도 안 되는 기사로 종종 등장한다. 뭐, 으레 있는 일이자 당연히 있는 일이라는 식이다.

무상교육과 무상의료인 건 말할 것도 없는데.. 개콘 김기리 식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지금부터 잘 들어. 내가 진정한 무상을 알려준다. 중학교만 공짜니까 티도 안 나지, 대학까지 공짜여야 무상의 완성! 수술비만 대주는 건 멋이 없지, 의료관광 보내줘야 무상의 완성!

이 모든 혜택을 누릴 조건은 단 한 가지, 이 나라 국적자일 것. 그런데 이 한 가지 조건이 가장 어렵다. 반 농담으로, UAE 국적을 얻는 3가지 방법이 있다고들 한다. 첫째, UAE 아버지에게서 태어나기. 둘째, UAE 남자와 결혼하기. 셋째, 엄청나게 유명한 축구선수 되기 (빅토르안이 러시아 국적 얻듯). 어쩌면 실상에 가깝다. 귀화가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첫째 조건인데, 양계혈통주의(부모 둘 중 한 명만 한국인이면 자녀는 출생 즉시 한국인)인 한국과 달리 UAE를 포함한 대부분 중동국가는 부계혈통주의다. 엄마만 이마라티인 아이들은 UAE에서 태어나 일생 여기서 자라도 외국인일 뿐이다.

지난 2011년 UAE 건국 40주년을 기념해 대통령령이 내려졌다. 어머니만 이마라티인 이들도 18세가 되면 UAE 국적을 신청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중동 지역에서 모계혈통의 국적 승계를 인정한 것은 UAE가 최초다. 그만큼 획기적인 변화지만 체감 현실로는 아직 못 미치는 듯하다. 최근 현지 신문기사에 따르면 작년 말까지 이마라티 여성 자녀 500명이 대통령령에 따라 국적을 얻었는데, 대기자는 여전히 밀려있고 처리 과정도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기사에 등장한 한 이마라티 여성의 20대 자녀 셋은 UAE에서 대학 교육까지 마쳤는데도 국적을 취득하지 못해 취업도 결혼도 못하고 부모에 기대어 살고 있다. 그들은 청소년 시절 교과서에 아버지 성을 따른 진짜 이름 대신 어머니의 성을 적으며, 친한 친구에게도 자신이 이마라티가 아니라는 사실을 숨긴 채 지내왔다고 한다.

UAE 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 기준 이 나라 거주민은 826만 명. 이 중 '에미라티', '이마라티' 라고도 하고 현지인이라는 의미로 '로칼'이라고도 부르는 UAE 국적 소유자는 95만 명(대략 11%)이다. 쿠웨이트나 카타르 같은 다른 GCC 부국들의 인구 구성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마라티'라는 이름의 최강 스펙. 그걸 꿈 꿀 수도 없는 이방인들, 그리고 그 문턱에 서서 안타깝게 발을 구르는 이들. 이 풍경을 목도한 게 내가 이 나라를 알아가는 첫 단추가 됐다.

심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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