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칼럼] 대통령의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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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라크 파병안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국회 연설을 들으며 지금 이 나라에 대통령은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설의 요점은 '명분이 없는 일이지만 북핵을 해결하고, 경제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파병을 결심했다'는 내용이었다.

대통령이 파병을 설득한다면서 '나는 명분을 중시하는 사람인데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이라는 변명을 하는데 누가 설득 당하겠는가.

그는 반전 시위에 대해서도 "시민단체들의 의사표현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라며 옹호하는가 하면 국가 기관인 인권위의 반전 성명도 말리지 않았다. 일종의 방관자였다.

38년 전 월남 파병안이 국회를 통과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적게는 국가 안전과 반공 투쟁을 강화하는 길이며, 크게는 … 자유에 봉사하며 평화에 기여하는 영예로운 일"이라고 말했다.

사실 월남 파병 때도 속사정은 지금과 비슷했다. 세계의 반전 여론이 거센 가운데 미국은 우리가 파병하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압력을 넣었다.

우리로서는 미국이 제시한 매년 2억달러 이상의 경제적 이익도 고려해야 했다. 그래서 용병(傭兵)이란 말까지 나왔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그런 속얘기를 입밖으로 꺼낼 수는 없는 것이다.

개인도 할 얘기가 있고 덮고갈 얘기가 있듯이,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명분이 없지만 보낸다는 얘기를 미국이 들으면 좋을 리 없고, 파병되는 당사자들은 맥이 빠지는 얘기다.

국가를 대표해 그런 결정이 불가피했다면 그에 합당한 말이 필요한 것이지 개인 인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최소한 국제 평화를 위해 테러와의 전쟁에 동맹국으로서 우리도 동참한다는 말쯤은 외교상 했어야 했다.

대통령이 못마땅한 마음을 토로하는데 국회의원인들 설득될 것인가. 파병안이 처리 안될까봐 대통령보다 야당이 더 조바심을 했으니 이번 일에 대통령은 없었고 야당만 있었다.

언론에 대한 盧대통령의 끊이지 않는 불만 표시 역시 대통령으로서 합당한 것인가 의문을 갖게 만든다.

언론을 견제받지 않은 권력이라면서 "나 또한 부당한 공격을 받았다. 그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하니 이 말이 도대체 대통령의 말인지, 어느 재야 인사의 말인지 분간이 안 간다.

권력을 쥐고 있는 대통령이 언론으로부터 박해를 받는다? 참으로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말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분명히 그렇게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느낌이 있다고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말해도 되는 것일까.

그 말이 정부의 언론정책에 줄 영향이 무엇이며, 이 정부가 밖으로 어떻게 비춰질 것인가를 왜 생각지 않는가. 언론 문제로만 보면 지금 이 나라에 대통령은 없다. 피해의식에 눌린 개인 노무현만 있을 뿐이다.

솔직함은 개인으로선 큰 덕목이다. 그러나 솔직함과 함께 고려돼야 할 덕목은 신중함이다.

특히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솔직함보다는 신중함을 더 요구하는 자리다. 대통령의 입이 무거워야 한다고 하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통령은 나라의 대표요, 최종의 자리이기 때문에 고려해야 할 요소가 보통사람보다 많기 때문이다.

대통령 입에서 부적절한 말들이 나오는 이유는 아직 역할의 혼동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시간이 자연스럽게 해결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빨리 극복할수록 유익하다. 개인도 과거에 묶여 있는 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듯이 정권도 과거에 묶여 있다면 미래를 내다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모든 직책은 그에 합당한 인식을 요구한다. 나라의 책임을 맡은 이상 하기 싫지만 해야 할 일이 있고, 하기 싫은 말이지만 해야 할 말이 있다. 대통령이 재야의 말을 한다면 이 나라 대통령이 해야 할 말은 누가 할 것인가.

염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일들이 빚어낼 파장이다. 제도의 붕괴랄까, 문화의 해체랄까 하는 현상으로 연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직에 합당한 언어가 있다고 상정하는 것은 문화의 공감을 전제하는 것이다.

혹시 일련의 일들이 이 문화를 바꾸겠다는 것이라면 우리 사회는 큰 소용돌이에 빠질 위험이 있다. 대통령이 언론의 박해를 받고 있다는 말은 대통령도 힘이 없으니 사회단체가, 대중이 나서서 해결해 달라는 메시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창극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