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디자이너 피에르·카르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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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내 성공의 뒤에는 「매스컴」의 역할이 컸어요.』 『20세기를 정복한 「디자이너」』로 불리는데 손색이 없을 만큼 「피에르·카르댕」은 그 「정복」의 비결을 거침없이 인정한다. 「장·콕토」 밑에서 연극의상을 도와주고 「크리스티앙·디오르」밑에서 재단 일을 했던 청년이 처음으로 「파리」에서 자신의 의상발표회를 열고 『놀랍고 또 놀랍다』는 평과 함께 하루아침에 「톱·디자이너」로 뛰어오른 이래 25년간, 「피에르·카르댕」이라는 이름은 「모드」의 대명사처럼 「세계제일」의 줄에서 왔었다. 『아무리 내가 뛰어난 생각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쌓아왔다 해도 그것을 전달해주는 신문과 방송과 잡지가 없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장삿속에 특히 밝아 「디자이너」라기보다는 사업가라는 꼬집힘을 간혹 「매스컴」에서 당하지만 그러나 『만일 내 창작이 형편없고 돈에만 신경 쓴다면 어느 누가 돌봐주겠느냐』고, 그는 그의 작품에 대한 예술적 정열을 내세운다. 무려 8백여명의 기자와 단독 「인터뷰」를 가졌었다고 그에 대한 세계적 호응을 자랑한다.
『나에게 있어 유행을 창조한다는 것은 곧 하나의 유행을 파괴한다는 의미입니다.』새로움을 향한 혁명가 적인 도전이 바로 그를 계속「톱·디자이너」로 이끄는 힘이라고 했다. 남들이 머리를 채 쓰지 못하던 남성「모드」를 일찌기 개척했고 옷에서 안경 「핸드백」 등 「액세서리」, 그리고 자전거 자동차 가구의 「디자인」까지, 연극무대와 식당과 전시실을 동시에 가진 자신의 건물 「에스파스」 (공간이라는 뜻)를 지어 예술활동의 움직임까지「디자인」한다는 그는 계속 「새것」을 향해갈 뿐이라고 했다.
『오늘의 모든 것은 바로 유행과 관계돼 있어요. 옷 하나만 봐도 옷감을 만들기까지의 첫 자연적인 손에서부터 생각해 보세요. 그러니까 이것은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 자신의 「디자인」 활동은 저 밑의 수많은 종업원의 생활과도 직결돼 있다고 말한다.
『아름다움이요? 글쎄요, 그것은 여성이고 남성이고 다 우리인간이 지니고 있는 위대한 능력 아니겠어요?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인간의 아름다움은 마음속에 있다고 봅니다. 내면에서 나오는 미, 이것을 어떻게 좀더 진실되게 표현하는가가 바로 「모드」라고 볼 수 있지요.』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56세의 「카르댕」씨, 『그러나 「잔·모르」와 6년간 함께 생활했지요. 불행히도 아기를 두지 못했지만….』 유명한 불 영화배우 「잔·모르」와의 「좋은 관계」를 그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여성해방운동에 절대 찬동합니다.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자유로와야 함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요. 남성과 여성이 어떻게 서로 동등하게 조화를 이루며 사랑하고 생활하는가가 문제일 뿐입니다.』
한국가구와 도자기를 좋아해서 자신의 건물 「에스파스」에 갖다놓고 감상한다는 「카르댕」씨는 지난 74년 서울 방문때 사간 한국 「실크」로 옷을 만들어 「컬렉션」에 냈다면서 『나는 재료를 어떻게 쓰는가 하는 길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중공의 「실크」 수출과 관련, 초청을 받고 있다는 그는 한국산 제품으로 「모드」를 창조해 보겠다고 계획을 편다.
그러나 서울방문동안 길거리에서, 백화점에서 「피에르·카르댕」의 그 숱한 「가짜」들을 보고 그냥 『엄청날 뿐』이라고 그는 웃는다.
『아마 내년에는 꼭 서울에서 내 작품발표회를 열게 될 것입니다.』 【윤호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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