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말 짝 속의 거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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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이상향으로 바뀌지 않는 한 다른 범죄들과 함께 밀수나 외화의 불법 반출·반입 같은 것도 계속 존재하게 마련이다.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미국 같은 풍요한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상류층의 「화이트·칼러」 범죄가 늘어 「범죄의 민주화」라는 표현까지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한국의 중앙정보 부장 깨나 지냈다는 김형욱씨가 「달러」를 불법으로 가지고 들어가다가 미국 세관에서 발각되어 「보호·관찰 1년」이라는 판결을 받았다는 보도에는 얼굴이 화끈하다.
「유럽」에서 7만5천「달러」라는 거금을 신고도 하지 않고 가지고 들어갔다는 것도 문제지만, 그걸 양복주머니도 아닌 양말 짝 속에 감추고 뒤뚱거리면서 걷다가 꼬리가 잡혔다니 그건 그 사람의 인격적인 자살 행위 같다.
김형욱씨는 작년의 의회 증언에서 박동선 사건, 통일교의 활동 때문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때로는 일본 사람 행세를 한다고 말하여 많은 사람을 웃겼다.
그는 미국서 자신이 「세계적인 영웅」이라는 망상을 갖고 살았다. 그러나 그는 있는 화살을 한꺼번에 모조리 쏘아버렸다. 이제는 그를 쫓던 일본 기자들도, 「뉴욕·타임스」의「리처드·핼로런」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박동선 사건 조사에 협조하게 만든 FBI를 원망하면서 술과 「골프」로 실의의 날을 보내고 있단다. 그런 궁상은 자업자득이지만 양말 짝 속의 거금으로 그런 묘한 이름의 판결을 받았다는 것은 FBI와의 밀월 관계가 공식으로 끝났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된다. 이런 추태가 문명자씨에 의해 세상에 폭로된 것도 흥미진진하다.
김형욱씨는 자신이 거금을 갖고 망명했다는 보도를 펄쩍 뛰면서 부인했다. 그러나 「유럽」으로부터의 7만5천「달러」는 「스위스」 은행 비밀 구좌에서 찾은 일부라는 추리가 가능하다.
기왕 가지고 나간 「달러」야 어쩔 도리가 없다. 그 돈을 빼다 쓰는데 덜 망신스런 방법이나 써주었으면 본인을 위해서도 좋고 한국을 위해서도 적선이 되겠다. <김영희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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