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유럽 戰後 복구 '잿밥 다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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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천억달러의 복구비가 투입될 것으로 예상되는 이라크 전후 처리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미국과 유럽이 벌써부터 갈등을 빚고 있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3일 열린 유럽연합(EU).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 임시 외무장관 회담에서 EU 측은 유엔 중심의 이라크 재건을 주장했다. 도미니크 드 빌팽 프랑스 외무장관은 "유엔만이 전후 이라크 재건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국제기구"라며 "전후 유엔이 이라크 재건을 위한 중추 역할을 맡는 것에 대해 EU 회원국과 (유럽의) 나토 구성국 간에 매우 광범위한 합의가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유럽 외무장관들에게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이라크에 민정 수립 이전의 초기 단계에선 군사령관들이 상황을 안정시키는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며 과도적인 군정 실시안을 내놨다. 그는 이라크 복구.재건작업에는 국제사회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미국 주도의 연합군이 전후 문제를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파월 장관은 "유엔이 어떤 역할을 맡을지를 정확히 규정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면서 EU 측의 '유엔 중심의 전후 처리'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유엔을 '파트너'로 불렀지만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분쟁이 끝나고 질서가 회복되는 대로 곧 구성될 임시 당국과 함께 일할 조정관을 임명해주기를 희망한다"고 말해 유엔 참여가 부수적인 수준에 머물 것임을 시사했다.

결과적으로 파월 장관은 유럽 외무장관들이 설전을 벌였지만 합의점을 찾는 데 실패했으며 이라크 전후 처리를 둘러싼 미국과 유럽의 견해차만 노출한 채 미국으로 돌아갔다.

파월의 발언에서 보듯 미국은 '전후 복구를 독식하겠다'는 입장이다. 미 하원은 3일 이라크전에 반대한 프랑스.독일.러시아.시리아 등을 전후 복구사업에서 배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전쟁을 사실상 혼자 치렀듯이 전후 복구의 보상 역시 자신들의 몫이어야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 특히 참전에 반대해온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전쟁은 미국 혼자 치렀지만 전후 복구사업만은 유엔이라는 국제기구의 이름으로 수행돼야 미국이 전후 복구사업을 노린 정복자가 아니라 인도주의적 해방군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 주장에는 국제기구의 그늘 아래 모든 국가가 공평하게 복구사업에 참여해 이익도 나눠야 한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영국 등 참전국들의 입장은 둘의 중간쯤이다. 영국의 퍼트리샤 휴잇 통산부 장관은 최근 미국 측에 "참전에 따른 지분"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 대외적으로는 "가능한 이른 시간 내에 이라크인들의 임시정부가 만들어져 전후 복구사업을 맡아야 한다"는 '제3의 길'을 제안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중동지역에 강한 자국의 영향력을 사업 기반으로 활용하겠다는 생각이다.

전후에는 전쟁보다 더 치열한 각국의 이해다툼이 또다른 국제정치의 실상을 보여줄 것으로 보인다.

런던=오병상 특파원
사진=브뤼셀 AP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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