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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걸은 아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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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앞자리였다. 유명 대학을 나와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장에 들어갔다. ‘알파(α)걸’. 2006년 미국 하버드대학 심리학자가 만든 말이다. 모든 분야에서 첫째가는 여성이란 의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알파(α)걸’이라 불렀다. 알파걸은 지는 법을 몰랐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유리천장을 뚫고 또 뚫었다. 자정을 훌쩍 넘기는 야근, 폭탄주 도는 회식자리도 이겨냈다. 알파걸 10년. 그녀의 건강에 돌이킬 수 없는 빨간불이 켜졌다.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임신할 계획이 있습니까?” 회사 면접관이 이승혜(가명·35)씨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지금 당장엔 없습니다.”

 이씨는 최근 소규모 공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원래는 외국계 컨설팅 회사의 팀장급 애널리스트였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MBA(경영학석사)를 딴 보답으로 얻은 자리였다. 그가 억대 연봉과 명예를 포기한 이유는 하나다. ‘건강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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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이씨는 임신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다. 하루 평균 14시간 이상의 업무를 견뎌내다 호르몬 계통에 이상이 생겼다. 갑상샘 호르몬 수치가 정상 범위를 벗어난 데다 자궁에 혹이 생겨 제거 수술을 받았다. 그마저도 회사 프로젝트 때문에 수술을 미루다 결국 밤늦게 응급실에 실려갔다. “수술실에 들어서면서도 전화로 업무 지시를 하는데 회의감이 들더군요. 그때 회사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알파걸’들이 앓고 있다. 사회생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고군분투한 결과가 몸의 질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성석주 차의과학대학 산부인과 교수는 “알파걸이 직장생활에서 겪는 불규칙한 식생활과 극도의 스트레스는 여성 호르몬 변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며 “가임기 여성의 경우 호르몬의 균형이 깨지면 생리불순이나 불임 등으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건강보험공단이 서울지역 여성건보가입자(약 255만 명)의 진료현황을 분석한 결과 25~35세 근로소득 상위 20% 여성(알파걸)이 불임치료를 받은 경우가 훨씬 많다. 인구 10만 명당 환자 수로 환산하면 알파걸이 4528명으로 전업주부(1993명)의 2.3배에 달했다. 35~45세는 1.9배다. 생리불순을 겪은 환자도 8~15% 더 많다.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직장생활의 과한 음주도 여성들에게 더 치명적이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보통 여성의 알코올 분해 능력은 남성의 절반 정도 수준이다. 한 차례에 소주 1~2잔, 양주 1잔, 맥주 1병 정도가 적당량이다. 대기업 건설회사 입사 2년차 여직원 홍모(27)씨는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술자리를 갖는다. 팀원 8명 중 6명이 남성이다 보니 술자리가 많은 편이다. 보통 폭탄주 석 잔이 넘어가는 술자리다. 홍씨는 “어릴 때부터 여자니까 봐준다. 여자니까 뺀다는 얘기가 가장 듣기 싫었다”며 “술자리에 빠지면 회사 생활의 중요 정보를 들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탓에 홍씨의 생리주기는 뒤죽박죽이 됐다. 홍씨는 “내년 봄 결혼을 앞두고 지난달부터는 병원 처방을 받아 생리주기를 조절하는 피임약을 먹고 있다”고 말했다.

 알파걸들은 몸에 이상 신호가 와도 좀처럼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여성이기 때문에 더 잘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울 시내 유명 대학 교수인 이모(40·여)씨는 매일 하루 일과를 병원에서 시작한다.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만성 알레르기성 비염이 찾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강의, 논문 제출, 학회 발표, 용역 프로젝트를 소화하기 위해 매일 15~18시간을 일한다. 이씨는 “어려서부터 주어진 일을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습관이 돼 스트레스나 업무량 조절이 잘 안 된다”고 털어놨다. 대형 로펌에서 변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이모(29)씨도 오전 9시에 출근해 새벽 1~2시까지 일하면서 탈모와 허리디스크 증상을 앓고 있다. 하지만 그는 “회사 내 남성 중심으로 짜인 네트워크를 뛰어넘기 위해서라도 일을 더 많이,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쉬지 못하겠다”며 “병원에 갈 시간조차 내기 힘들다”고 말했다.

 몸의 이상 신호를 무시하다 병을 키운다. 행정고시 출신의 고위 공무원 김모(47)씨는 현재 유방암으로 투병 중이다. 30대 중반부터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없던 꽃가루 알레르기가 생겼다. 헌혈을 하러 갔다가 “혈액 비중이 낮아서 안 된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다가 5년 전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았다.

정혜선 가톨릭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몸의 변화를 관찰하는 능력과 지혜가 성공하는 여성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윤대현 서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남성과 여성의 체력엔 분명한 차이가 있다”며 “지지 않겠다는 마음만으로 몸 관리를 소홀히 하면 면역체계 등이 쉽게 망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하루 세 번 짧은 심호흡 또는 10분 사색하며 걷기 등으로 자신만의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혜미·정종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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