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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혀질 「동학사상의 형성과정」|새로 공개된 「도원기」·「성훈·가어」의 평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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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동학의 2세 교주 해월 최시형의 동학 「도원기」와 그의 직계 제자 귀암 김연국의 「성훈·가어」·「동경대전해의」발견은 초창기 동학사장의 원형을 밝혀낼 열쇠를 얻은 것으로 학계는 평가했다. 사실 지금까지 초기 동학의 역사는 기록이 전혀 없어 구전 에 의존해왔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나온 문헌들은 동학사상의 형성과정을 구명하고 본래의 모습을 찾아내는데 가장 귀중한 자료가 된다.
「도원기」는 1880년 해월이 직접 엮은 수필본으로 표지는 「수운선생 도덕집」이라 썼고 속에는 「최선생문집도원기서」로 되어있는 동학사다. 수운 최제우의 탄생에서부터 1860년 동학의 창도, 1864년 대구에서 처형당하는 모습과 그 뒤를 이은 해월이 1880년까지 포교조직을 넓혀 가는 비밀 활동상이 상세히 기록돼있다. 끝 부분에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동경대전」(동학 최고의 경전) 초간본 간행에 관해 자금지원자와 담당 부서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서울대 신종하 교수는 『지금까지 전혀 찾지 못했던 시기에 1880년의 책, 그것도 2세 교주 해월이 직접 엮은 공식 동학사기록이·나옴으로써 동학사상사는 앞으로 재정리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특히 수운이 동학을 창시한지 4년만에 사도를 퍼뜨렸다는 죄로 처형당하고, 그 뒤를 이은 해월이 당국의 지명수배를 당한 몸이 면서도 교세를 더욱 넓히면서 민중 속에 뿌리를 박아 가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다.
지하로 숨어든 초기의 동학은 주로 강원·경북의 산간벽지를 무대로 활동했다. 활동의 핵심 「멤버」들은 1873년부터 이름에 「시」자를 넣기로 하고 해월도 분명 경상을 시형으로 바꿨다. 이렇게 이름을 바꾼 사람이 모두 12명으로 나타났으며 이들이 비밀조직을 유지하면서 활동한 모습을 이 책은 낱낱이 적어놓았다.
이들 핵심 「멤버」는 때와 곳에 따라 변성명을 하고 신분을 바꾸고 했다. 때로는 머슴행세를 하고 관에 쫓길 때는 끼니를 굶고 어떤 매는 동사직전에까지 이르기도 했다고 적혀있다.
이 원고는 당시 처음으로 정리해 놓은 기본 경전인 「동경대전」과함께 간행할 계획이었으나 해월이 쫓기는 몸이었기 때문에 미처 출판을 못한 채 보따리에 싸서 틀고 다녔던 것으로 신 교수는 풀이했다. 해월이 평소 「최 보따리」라는 별명을 들었던 것도 이에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최시형 사후 얼마 안 있어 천도교와 시천교로 갈라진 동학은 각각 다른 역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천교종역사」가 1915년에, 그리고 이보다 18년 뒤에 「천도교 창건사」가 나왔으나 이 둘이 모두 동학의 바른 역사로는 보기 어렵게 됐다고 신 교수는 판단했다. 즉 「도원기」만이 동학의 청동역사가 되리라는 주장이다.
한편 시천교로 갈라선 귀암 김연국 주석의 「동경대전해의」에 대해 고려대 최동희 교수는 『수운과 해월의 본래 사상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귀암이 해월의 사상을 가장 충실하게 계승한 직계제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월의 사후 일본에 망명했다 돌아온 손병희 등 「해외파」에 압도당해 귀암 측은 주도권을 잃었다.
그 뒤 동학은 일제시대를 통해 어떤 의미에서는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귀암의 저작물을 통해 그의 사상과 수운·해월의 사상에 있어서도 원줄기를 가장 가깝게 찾아내게 된 셈이다. 이런 점에서 김연국이 쓴 「성훈·가어」도 막중한 뜻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권순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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