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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푸틴, 5600자 공동성명 … 미·일 보란 듯 사실상 동맹선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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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1일 중국 상하이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회의 정상회의에 참석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 [상하이 로이터=뉴스1]

20일 밤 상하이(上海)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회의(CICA) 정상회의 만찬장. 참석한 46개 국가와 국제단체 지도자들의 눈이 한 곳에 집중됐다. 식탁 위에 펼쳐진 34m 비단 띠였다. 낙타와 만리장성 등이 그려진 이 황색 비단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제창한 ‘실크로드 경제권’을 뜻했다. 북방과 해상 비단길 경제권을 구축해 아시아 지역 협력을 강화하고 이를 새로운 역내 안보 체제로 발전시킨다는 중국의 포석이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러시아다. 시 주석은 20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실크로드 경제권 의미를 설명하고 동북아 새로운 역내 질서 탄생을 알리는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미국과 일본 동맹에 홀로 맞섰던 중국이 러시아와 연합하는 새로운 동북아 질서다.

 두 정상의 만남은 지난해 3월 시 주석 취임 이후 일곱 번째다. 회담 이후 발표한 성명은 25개 항목 5600여 자에 달한다. 성명 내용은 ‘동맹’ 선언이나 다름없다.

 우선 두 나라가 내정간섭에 반대하며 일방적 제재 정책과 타국의 헌법 질서 변경 활동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는 내용이 관심을 끈다. 중국의 영토 분쟁과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시사다. 일본의 헌법 개정을 통한 재무장에 긍정적 입장을 취한 미국에 대한 경고 의미도 있다.

 일본에 대해서는 전후 질서를 파괴하지 말라고 했다. 성명은 “양국은 내년 반(反)파시스트 전쟁 및 중국 인민의 항일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행사를 공동으로 거행키로 했으며 (일본의) 전후 국제질서 파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터넷 안전 문제도 언급했는데 이는 최근 미국이 중국 현역 장교 5명을 해킹 혐의로 기소한 것에 대한 공동 대응을 예고한 것으로 보인다.

 성명은 에너지에 이어 인터넷과 첨단기술 분야에서도 동반자 관계가 구축됐음을 알렸다. 에너지 분야에서 러시아는 2018년부터 30년간 중국에 연간 380억㎥의 천연가스를 공급하기로 했다. 이는 중국 소비량의 23%, 러시아 가스프롬 수출량의 16%에 달하는 수치다. 계약 규모는 4000억 달러(약 410조원)에 이른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러시아는 또 700억 달러(약 71조5000억원)를 투자해 동부지역의 천연가스를 중국으로 수출하기 위한 새로운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기로 했다.

두 나라는 미국과 유럽이 장악하고 있는 대형 여객기 분야에도 진출해 공동 생산에 나서기로 했다. 환구시보(環球時報)는 21일 러시아가 중국 판매를 꺼렸던 최첨단 전투기 Su(수호이)-35S 거래계약도 타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중국은 Su-35S 24대를 도입해 현재 개발 중인 5세대 스텔스 전투기인 젠(殲)-20(J-20)과 J-31의 전력화가 마무리될 때까지의 공백기를 채운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중국의 군사력 증강과 기술 유출을 우려해 수년째 판매를 미뤄왔다. 러시아의 Mi-26 중형 수송 헬기의 중국 내 생산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두 동맹관계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 밖에 성명은 ▶2015년까지 양국 무역액 1000억 달러를 달성하고 ▶무역·투자·우주항공·여행·인프라 건설·전력·자동차 분야 등에서의 협력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번 공동 성명이 주목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대부분 항목에서 ‘호소하고 바란다(呼<7C72>)’ 대신 ‘반드시 해야 한다(必須)’고 썼다는 점이다. 상투적인 성명이 아니라 양국 협력을 구체적으로 강제하고 있다는 얘기다. 양청(楊成) 화둥(華東)사범대 러시아 연구소 부주임은 “중·러 사이에 역내 정세를 광범위하고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공동 대응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힌 성명은 처음이며 이는 향후 역내 질서에 큰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러의 전례 없는 밀착은 두 나라 모두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국제정세와 맞물려 있다. 중국은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와 남중국해 석유 시추를 둘러싸고 각각 일본 및 베트남과 분쟁을 하고 있는데 미국의 개입을 우려하고 있다. 또 러시아는 크림반도 합병을 둘러싸고 미국 등 서방세계의 제재를 받고 있다.

 한편 푸틴 대통령은 20일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양국 간에는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으며 결심하고 실현할 수 있는 계획이 많다”고 말했다. 중국의 정치 평론가인 무커(穆可)는 “중·러는 현재 미국을 상대로 싸우는 공동 운명체에 처해 있으며 동맹관계를 구축해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를 깨려 하고 있다. 시 주석과 푸틴의 강력한 리더십을 고려하면 향후 10년간 동북아에서 새로운 국제질서 재편을 둘러싼 긴장이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베이징=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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