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억「달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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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우리 역사상 최초의 무역은 「조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종주국인 중국에 때맞추어 예물로 물건을 바치는 형식이었지만, 오늘의 감각으로 보면 그것은 엄연한 무역이었다. 「바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고 그 답례로 받아오는 물건이 적지 않았다. 일종의 관무역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 나라가 대륙의 열국을 상대로 그 「조공 외교」를 펴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였다. 비록 상대국이 열국이긴 했지만 그런 외교가 능동적으로 이루어 졌던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무역에 대한 열의랄까, 관심은 사뭇 우리 민족의 의지로서 나타났던 것도 같다.
우리는 주로 토산품을 조공품으로 이용했다. 그 대가로 받아오는 물건들은 선진 문물들이다.
비단에서부터 문방구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요긴한 물건들만 챙겨 온 것이다. 그것도 주는 대로 받아 온 것이 아니고, 우리가 품명을 지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양으로 보아도 바치는 물건보다는 받아오는 물건이 더 많았다.
그야말로 「무역 수지 흑자」의 실속을 차린 셈이다.
신라말기의 해장 장보고는 이를테면 무역왕이었다. 그 무렵 황해에 횡행하던 당나라의 해적들을 물리치고 해상권을 장악, 당나라와 일본 사이의 무역을 관장했었다.
송나라 때에는 고려와의 무역 역조 현상으로 비명을 듣기도 했다. 송의 소식은 기어이 고려와의 조공 외교를 맹렬히 반대했었다. 이조에 이르러 중국은 그런 역조를 막는 방법으로 3년 1공을 요구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연 3공을 강행, 때로는 4공까지도 했다. 악착같이 덤벼든 것이다.
해방 후 미 군정 때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도 우리의 수출품을 보면 조공 시절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물물교환식의 이른바 「바터」 무역으로 중석·철광석·고령토·김 등 1차 산품을 실어가고, 생필품을 들여오는 정도에 머물렀다. 「마카오」나 「홍콩」이 무역의 천국처럼 생각되던 시절도 역시 이 무렵이다. 그나마 보따리 장수의 규모였다.
그러나 1억「달러」 수출을 기록한 1964년도부터 우리 무역은 새로운 경지에 접어들었다. 수출 품목의 절반이 공산품이었다. 수출 상품다운 물건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불과 6년 안에 수출 실적은 10배를 기록, 백억「달러」 수출을 달성한 금년은 중화학 제품의 비중이 36%나 되었다. 수출품의 3분의 1인 셈이다.
백억「달러」의 수출은 국민 소득의 3분의 1, 고용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비중이다. 정말 「수출입국」은 빈말이 아니게끔 되었다.
백억「달러」는 우리 나라 경제의 한 분수령을 기록하는 것도 같다. 산업 구조의 변화·사회 의식의 변화는 필연적인 요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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