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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화학전쟁 … 아카시아, 염소 오면 잎 맛없게 바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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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초여름에 접어들면서 산과 들의 녹음이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고 있다. 싱그러운 숲을 찾아 삼림욕(森林浴)을 즐기는 사람도 많다. 삼림욕을 하면 나무가 내뿜는 살균성 물질인 피톤치드(phytoncide) 덕분에 면역이 강화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피톤치드는 식물을 뜻하는 ‘phyton’과 죽이다란 뜻의 ‘cide’가 합쳐진 말이다. 피톤치드는 식물이 곤충·세균·곰팡이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내뿜는 물질이다. 사람들이 이를 쐬면 아토피 피부염 치료나 스트레스 해소 효과를 얻는다.

 봄과 여름에 소나무·편백나무 같은 침엽수림에서 피톤치드가 많이 나온다. 소나무 숲 1㏊에서 하루 5㎏의 피톤치드가 배출된다는 보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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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생물이 뒤엉켜 사는 자연 속에서는 큰 나무라도 마음 놓을 수 없다. 자칫하면 곤충이나 미생물의 공격을 받아 희생될 수도 있어서다.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기에 식물들은 방어무기를 발달시켜 왔다. 식물은 같은 종끼리 암호를 교환하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 수백 가지 다양한 물질을 내뿜으며 ‘화학전쟁’을 벌인다.

 독일 막스플랑크 화학생태연구소 과학자들은 2010년 박각시나방 애벌레의 공격을 받은 담뱃잎이 화학물질인 ‘녹색잎 휘발물질(GLVs)’을 분비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분비된 물질이 애벌레의 침과 반응하면 새로운 물질이 만들어진다. 새 물질은 ‘SOS(긴급 구조 요청 신호) 화학물질’로 작용해 긴노린재라는 포식자(捕食者)를 불러들이는 역할을 한다. 결과적으로 긴노린재가 담배를 위해 박각시애벌레를 없애주는 셈이다. 적을 이용해 또 다른 적을 치는 이이제이(以夷制夷)다.

 2008년 미국 국립대기연구센터(NCAR) 연구진과 2012년 멕시코 신베스타브-이라푸아토대학 연구팀은 가뭄이나 벌레의 공격으로 스트레스를 받은 식물이 아스피린과 유사한 화학물질인 살리실산메틸(methyl salicylate)을 분비하는 것을 밝혀냈다. 연구팀은 “이 물질이 식물끼리 서로 위험을 알리는 신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실제로 병에 걸리거나 벌레에 먹힌 리마콩(Lima bean)은 이 물질을 배출했고, 이 물질에 노출된 주변 리마콩은 세균 감염에 대한 저항력이 크게 높아졌다.

 화학전의 명수는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아카시아(Acacia·국내서 흔히 보는 아까시 나무와는 다름)다. 아카시아는 염소나 영양(羚羊)이 자신을 뜯어먹으려 하면 나뭇잎의 타닌(tannin) 성분과 단백질을 결합시켜 소화하기 어려운 성분으로 바꾼다. 또 잎을 뜯긴 아카시아는 즉각 화학물질 암호를 발산한다. 암호를 받은 주변의 아카시아도 열심히 화학반응으로 잎을 맛없게 만든다.

 아카시아와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개미는 초식동물이 다가오면 집단 공격을 가해 아카시아를 보호해준다. 대신 아카시아는 특히 자기를 지켜주는 개미만 이용할 수 있는 먹이를 제공한다. 이 먹이 중에는 단백질 분해 효소의 기능을 저해하는 물질이 들어 있어 다른 곤충은 먹어도 양분을 얻을 수 없다. 개미만 저해물질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식물끼리도 화학전을 벌인다. 가을에 붉은 단풍을 떨어뜨리는 것도 단풍잎의 안토시아닌(anthocyanin) 성분을 이용해 주변에 다른 종류의 나무가 자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조용한 숲 속에서 벌어지는 식물의 치열한 전쟁 덕분에 사람들이 건강을 얻고 단풍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강찬수 환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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