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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재의 愚문賢답] 1년 250일 이상 현장 찾아 스킨십 경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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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호 20면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은 혁신적인 돌격선인 거북선이 회사의 DNA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지난 1월 하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아모레퍼시픽 오남점. 이 회사 서경배(51) 회장이 여성 방문판매원들과 간담회를 했다. 40대 후반의 한 방문판매원이 “생산이 중단된 설화수 예서 메이크업 제품을 찾는 고객들이 꽤 있는데 제품을 구할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해당 제품은 이미 생산이 중단돼 재고도 없었다. 서 회장은 “여러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고객들도 원한다면 즉시 생산을 재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본사로 돌아와 담당 임원에게 해당 화장품을 다시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날 서 회장을 수행한 이우동 방판사업부 상무는 “이 일로 방문판매원들이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게 됐다며 환호했다”고 전했다.

“답은 현장에 있어, 이 친구야” ④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서 회장은 한 달에 한 번 방판 특약점, 아리따움 가맹점 등 거래처를 찾는다. 보통 현장 직원들과 간담회를 갖거나 점심식사를 같이한다. “식사 때면 쌈을 싸서 직원 입에 넣어 주기도 한다”고 한 임원이 말했다. 이런 자리가 있을 때마다 그가 단골로 던지는 질문이 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 회사 임원들도 현장을 자주 방문한다. 이 상무 같은 영업 담당 임원은 말할 것도 없고 지원부서를 맡은 임원도 근무일수의 30%를 현장에서 근무한다. 원부자재 공급업체 등 협력업체를 격려 방문하는 식이다. 이 상무는 현장에서의 이런 스킨십을 회사 안에서 ‘왼손 경영’이라 한다고 말했다. 현장 사람들의 근무여건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고 현장 활동에 대해 칭찬과 격려를 하는 것을 말한다. 매출·이익 등 실적을 따지는 오른손 경영과 아울러 이 회사에서는 ‘양손 경영’이라고 부른다.

아시아 12개국 271개 매장 보유
서경배 회장은 1994년 31세에 태평양 기획조정실 사장을 맡아 경영 전면에 나섰다. 태평양엔 부친이자 창업주인 고 서성환 선대 회장의 개성상인 정신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도 98년 외환위기는 비껴가지 못했다. 서 회장은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해 훗날을 대비했다. 화장품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증권·패션·야구단·농구단 등도 정리했다. 현재 그룹의 화장품 사업 비중은 84.8%다.

 위기를 넘어서자 그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해외 진출은 일제강점기 징용당해 중국으로 끌려갔다가 드넓은 대륙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예견했던 선대 회장의 꿈이기도 했다. 해외에서도 그는 양손 경영원칙을 그대로 적용했다. 지난 9일 공시한 올 1분기 실적을 보면 화장품사업 해외 매출은 1년 전에 비해 49.7% 증가한 1923억원을 기록했다. 서 회장이 지난해 9월 창립 68주년 기념식에서 “가까운 미래에 회사 전체 매출의 51% 이상을 한국 밖에서 내겠다”고 장담한 게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서 회장은 연중 3분의 2 이상을 국내외 영업현장에서 보낸다. 이렇게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매월 초 열리는 정기 조회를 통해 전 임직원과 공유한다.

아모레퍼시픽의 글로벌사업은 지난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매출액(5399억원)이 전년보다 27.8% 성장했는데 특히 중국과 나머지 아시아권에서 각각 29.1%, 64.1%의 빠른 성장을 했다. 현재 해외 매출의 비중은 약 17%. 중국 시장의 경우 아모레퍼시픽 상하이연구소 소비자연구팀과 공동조사를 벌여 중국 소비자들은 기후가 건조한 탓에 피부 보습에 대한 니즈가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런 현지조사 덕에 라네즈는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에서 수분 전문 브랜드로 입지를 다졌다. 지난해 라네즈 해외 매출액(51.5%)은 국내 판매액을 앞질렀다. 아모레퍼시픽은 라네즈를 아시아 브랜드로 굳히려 하고 있다. 이 회사는 라네즈가 대만·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10개국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태국에 진출한 설화수는 이 나라 최상류층을 일컫는 ‘하이소(High Society)’를 겨냥한 구전 전략을 구사해 럭셔리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에뛰드는 일본·싱가포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베트남 등 아시아 12개국에 총 217개의 매장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홍콩에 진출한 이니스프리는 지난해 11월 싱가포르 오차드 로드에 1호점을 냈다. 올 하반기엔 태국에 진입한다. 아모레퍼시픽은 아시아의 아름다움을 담은 글로벌 명품 화장품을 지향하고 있다. ‘아시안 뷰티’의 표준을 만들어 내는 선도 기업이 되겠다는 것이다. 이를 표방한 한방화장품 설화수는 2010년 뉴욕 최고급 백화점 버그도프굿맨에 입점했다.

이 회사의 해외사업이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1988년 ‘순’이라는 브랜드로 프랑스에 처음 상륙했을 땐 현지 시장에 어두워 실패를 맛봤다. 프랑스는 전 세계 화장품 다국적기업들이 역량을 집중하는 전략적 시장이다. 또 프랑스 등 구미 시장은 스킨케어 제품이 주류인 국내와 달리 향수가 전체 화장품의 30~50%를 차지한다(국내 시장은 5% 안팎). 화장법도 다르다. 우리나라 여성은 로션을 바르고 나서 크림을 바르지만 프랑스 여성은 피부가 지성이면 로션만, 건성이면 크림만 바른다. 서경배 회장은 “고객은 나라마다 달라 직접 겪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더라”고 말했다.

이런 분석을 토대로 아모레퍼시픽은 97년 향수 ‘롤리타 렘피카’를 들고 프랑스 시장에 다시 뛰어들었다. 현지에 나가 있던 본사 직원을 전원 철수시키고 대부분 프랑스인으로 대체했다. 2004년엔 프랑스 사르트르에 대지 약 3만 평, 건평 5000평짜리 현대식 공장을 지었다. 유럽 시장 공략의 교두보였다. 이런 현지화 전략은 주효했다. 17년이 지난 지금 롤리타 렘피카는 프랑스·영국·이탈리아 등 유럽 주요 나라를 비롯해 세계 110여 개국에서 팔리는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했다. 2011년엔 럭셔리 해외 향수 브랜드 ‘아닉구딸’을 인수했다. 국내 화장품 기업 최초의 해외 브랜드 인수. 향수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작년 매출의 3% R&D 투자
아모레퍼시픽은 수평적인 기업문화를 뿌리내리기 위해 2002년 전 구성원의 호칭을 ‘님’으로 통일했다. 12년이 흘렀는데 잘 지켜질까? 한 간부는 팀장급까지는 99%가 이렇게 부른다고 귀띔했다. 젊은 사람들은 성을 빼고 ‘○○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한민국 넘버원’ 아모레퍼시픽의 70년사는 곧 한국 화장품의 역사이다. 54년 업계 최초로 연구실을 만들어 연구개발(R&D)을 시작한 이래 꾸준히 R&D에 투자해 메로디 크림, ABC포마드 등 다수의 국내 1호 제품을 내놓았다. 한방화장품 설화수, 아이오페 에어쿠션, 라네즈 BB쿠션 등의 쿠션류 화장품은 세계 최초로 선보인 혁신적인 제품이다. ‘오스카’라는 브랜드로 국내산 화장품 수출도 처음 했다. 이 회사의 지난해 R&D 투자액은 약 831억원으로 매출액 대비 비중(2.68%) 면에서 글로벌 화장품 메이커들과 비슷한 수준이다.

아모레퍼시픽 측은 올해는 매출의 3% 선에서 R&D 투자를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모레퍼시픽의 비전은 ‘원대한 기업’(Great Global Brand Company)이다. 좋은 기업(Good Company)은 넘어섰다는 자신감의 발로다. 글로벌사업의 비중을 50%로 키워 2020년 아시아 1위, 세계 4위의 화장품 메이커로 발돋움하는 게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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